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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애 Feb 26. 2021

퇴계의 건축관을 볼 수 있는 도산서당과 도산서원

서원: 한국의 14번째 세계유산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총 9곳의 서원(소수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무성서원, 필암서원, 돈암서원)이 한국의 14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었죠! 한국의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과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문화적 전통을 지속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으로, 지방 사립학교면서 자치기구의 역할도 수행했기에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서원의 특정한 건축 유형 또한 의미가 있어 눈여겨 볼만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9곳의 서원 중 ‘퇴계의 건축관을 볼 수 있는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안동 도산서원 전경 ⓒ문화재청

먼저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같은 공간에 자리하면서 사당과 서원으로 분리되는 이원적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퇴계 이황의 학문적 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퇴계는 생전에 조정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에 뜻을 두고 서당과 서원 건립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계상서당(溪上書堂)과 소수서원(紹修書院) 등 여러 사림의 근거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계상서당은 퇴계가 원장으로 있어 그의 학문을 직접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퇴계의 서당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그에 따라 학문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금응훈과 여러 학도들은 도산에 터를 보아 두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퇴계는 홀로 도산에 가 터를 살펴보았고 그 감회를 시로 남길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이렇게 새로 지어진 공부의 장소가 도산서당입니다. 


안동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의 타계 후 신위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퇴계의 후학들은 새로 터를 정하기보다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도산서당을 앞에 두고 뒤쪽의 터를 다듬어 도산서원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를 선언하며 47개소의 서원만을 남겨두었을 때에도 살아남아 조선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전면 ⓒ문화재청

이처럼 퇴계로 인해 존재하는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의 공간구성에는 퇴계의 건축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도산서당은 퇴계가 직접 건축도면을 설계하여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서당의 공간에 속하는 건물로는 학문의 공간인 도산서당과 학도들의 주거지인 농운정사(隴雲精舍)가 있습니다.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내부 암서헌(巖棲軒) ⓒ문화재청

도산서당은 세 칸으로 서쪽 한 칸은 부엌이고 중앙의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 동쪽의 대청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입니다. 완락재는 퇴계가 거처하던 방으로 독서를 위해 서가를 설치하였습니다. 퇴계는 공부와 수양의 의미로 독서를 중요시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있는 곳입니다.   

   

암서헌은 대청마루를 기둥 밖으로 나가게 공간을 확장하고, 동쪽으로는 살마루를 덧대는 등 최소한의 면적으로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넓혀진 공간은 서당의 유식(遊息) 기능을 수행하며 자연과 통합적인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안동 도산서원 농운정사 전면 ⓒ문화재청

농운정사는 공(工)자형으로 창과 문의 높이를 다르게 하여 채광을 조절하였습니다. 가운데 일자형은 잠자는 방으로 지숙료(止宿寮)라 하고 앞쪽의 서쪽 방은 휴식의 공간인 관란헌(觀瀾軒), 동쪽은 공부방으로 시습재(時習齋)라 합니다.


역동서원 ⓒ문화재청

도산서당과 달리 도산서원은 퇴계의 사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전에 서원 건립으로 만들어진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영향이 존재합니다. 도산서원은 역동서원의 배치형식을 반영하여 신위를 모시는 사우(祠宇)를 가장 뒤에, 강당을 중심에 두고 그 앞에 학도들이 거처하는 재사를 배치했습니다.    


또한, 역동서원의 여러 건물 명칭을 재구성하거나 모방하여 편액을 썼습니다. 가장 뒤쪽에 자리한 사우는 퇴계의 학덕을 우러르며 제사를 지낸다 하여 역동서원의 상현사(尙賢祠)를 차용해 상덕사(尙德祠)로, 서원의 중심으로 학도를 가르치고 원장이 기거하는 강당은 명교당(明敎堂)을 전교당(典敎堂)으로 하여 이름을 지었습니다. 반면에 강당 앞의 재사를 지나쳐 서원으로 들어오는 진도문(進道門) 옆의 장서고는 역동서원의 광명실(光明室)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정면 ⓒ문화재청

이처럼 도산서원은 역동서원의 배치형식을 따라 하고 건물의 명칭을 유사하게 사용했지만, 강당의 구성과 재사의 이름에서 차이를 두었습니다. 역동서원의 명교당은 총 다섯 칸으로 세 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협실을 두었으나 도산서원의 전교당은 동협실을 없애고 서협실만을 남겨두었습니다. 이때 서협실의 이름은 한존재(閑存齋)로 간사함을 물리치고 참된 마음을 보존하여 공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내부에서 바라본 동재와 서재 ⓒ문화재청

재사의 이름은 각각 『논어論語』 「자한子罕」편과 「태백泰伯」편에서 인용하여 지었습니다. 이는 퇴계의 후학들이 그의 학문방법을 편액에 함축한 것입니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라 하여 학문의 내용을,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 하여 학문의 자세에 유의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강세황의 도산서원도 ⓒ문화재청

퇴계의 영향 아래에 만들어진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은 퇴계가 후진 양성에 힘쓰며 건축과 자연이 통하게 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착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 천지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이라고 뜻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계상서당이 있음에도 도산서당을 추가로 건립하였고, 두 곳을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퇴계의 건축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서당과 서원의 유식 공간을 자연과 연결하려 했다는 입니다. 이는 퇴계가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에서 잘 보이는데 암서헌과 관란헌이 대표적입니다. 퇴계는 서당과 서원의 터는 한적하고 고요한 곳이어야 학문에 정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도산의 터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고요했고, 퇴계는 암서헌과 관란헌의 중심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구성하여 건축과 자연이 연결되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학문 정진의 공간과 유식의 공간을 집약적으로 구현해내었습니다.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통해 알아본 퇴계의 건축관을 보니 서원이 가진 가치를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도산서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원의 의미도 되새길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참고 자료
문화재청 www.cha.go.kr
안동 도산서원 www.andong.go.kr/dosanseowon
유네스코와 유산 heritage.unesco.or.kr
한국서원연합회, 『한국 서원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 한국의 서원유산1』.
한국서원연합회, 『한국 서원의 세계문화유산적 가치, 한국의 서원문화』.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 문지애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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