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웨그만 : 비잉 휴먼》
윌리엄 웨그만(William Wegman)은 매사추세츠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나 사진, 설치, 조각, 퍼포먼스, 비디오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폭넓은 작품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다재다능한 미국 출신의 작가는 1970년 서부 개념 미술을 이끈 주요 인물이며 초창기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현재 바이마라너 반려견을 의인화한 사진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현대사진의 거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웨그만의 반려견이자 뮤즈인 바이마라너 ‘만 레이’는 웨그만이 자신만의 독특한 사진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만 레이가 우연히 웨그만의 비디오 영상에 출연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바이마라너는 웨그만의 작품에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회색빛의 짧은 털을 가지고 있으며 힘줄과 근육이 잘 발달 되어있는 사냥견을 사람처럼 옷을 입히고 대형 폴라로이드로 찍는 것이 큰 특징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폴라로이드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 디지털 사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전시구성은 바이마라너를 통해 용접공부터 농장 소년, 보안관,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사회 여러 계층의 모습을 보여주는 [SECTION 1: 우리 같은 사람들] / 16세기 베네치아 상류층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사교춤을 추며 어울리는 것처럼 바이마라너가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SECTION 2: 가면무도회] / 환각의 상태에서 반으로 나누어진 모습이나 어둠 속에 보이는 바이마라너의 혼령을 볼 수 있는 [SECTION 3: 환각] / 피카소와 브라크의 영향을 받아 구성에서 실제 대상의 단순한 표현 방식과 밝은 색상을 사용하는 [SECTION 4: 입체파] / 마크 로스코, 바넷 뉴면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색면 회화를 개를 통해 보여주는 [SECTION 5: 색채면] / 바이마라너의 섹시함과 시크함으로 명품이 사랑하여 광고 모델이 된 [SECTION 6: 보그] / 바이마라너의 포즈를 연구하고 몸에 초점을 맞춘 [SECTION 7: 누드] / 꼬리를 통해 기분 상태나 의도를 표현하는 개를 주인공으로 한 [SECTION 8: 이야기] / 주인의 명령 의도를 앞서 파악하고 행동하는 총명한 바이마라너를 담은 [SECTION 9: 앉아! 가만 있어!]로 되어있다.
웨그만의 모든 작품에 바이마라너의 모습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모든 작품에는 그의 반려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시의 부제인 “비잉 휴먼”에 걸맞게 인간의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며 작품 속 ‘인간이 되는’ 바이마라너의 모습을 대형 폴라로이드, 디지털 사진, 비디오 등으로 관람할 수 있다.
웨그만은 로스앤젤레스 롱비치에서 처음 만난 ‘만 레이’ 외에도 (전시 작품 중에서) 14마리 정도의 바이마라너와 함께 작업했다. ‘만 레이’라는 이름은 웨그만이 가장 존경하는 사진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만 레이가 세상을 떠난 후 데려온 페이 레이부터 3대에 걸친 반려견들을 자신의 뮤즈로 삼았다.
그가 사랑했던 바이마라너는 사냥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는 견종으로, 다리가 길고 근육질이며 몸의 윤곽이 뚜렷하다. 견고하고 단단한 몸에 유연한 움직임으로 포즈를 잡으니 모델이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탄탄한 피부에 회색빛의 짧은 털은 매혹적으로 보이는데, 어떤 색상이든 잘 소화할 수 있는 톤이라 인간의 옷을 걸쳐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특히 약간 파르스름한 빛깔의 눈은 잿빛의 몸체와 대비되어 작품 속에서 더욱 눈에 띈다.
작품 속 바이마라너는 구도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거의 눈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작품 밖의 관람자가 아니라 작품을 찍고 있는 웨그만일 것 같았다. 충성심이 높은 바이마라너가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잡고 사진을 찍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웨그만을 바라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색을 띤 강아지의 눈이 향하는 곳을 생각하다 보니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사진을 찍는지도 궁금해졌다. 왜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인간의 옷도 입고 포즈를 취하는 강아지도 충분히 그만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 같다’라는 말이 조금 우습긴 하지만, 비잉 휴먼을 향한 작품에서 자세나 옷, 장식보다도 더 인간 같이 보이게 만드는 건 눈이 아닐까 싶어졌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SECTION 2: 가면무도회]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눈만 가리는 가면부터 몸 전체를 감싸는 천까지 하나씩은 바이마라너의 일부를 가려서 신분을 숨기는 체하는 장면이 꼭 인간이 쓰는 가면들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인간 같이 느껴졌었다.
웨그만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바이마라너 세계관을 보여주는 듯한 전시 설명도 한몫했다. 16세기 베네치아 상류층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사교춤을 추며 어울리는 모임에서 유래되었다는 가면무도회 서술은 사실이면서도 바이마라너의 입장에서 가면무도회는 깊은 정신적 뿌리를 느낀다는 말은 상상이다.
사실에 거짓이 살짝 섞여 바이마라너 픽션을 만들어낸 웨그만이 풀어내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다만 어디까지가 계획된 유머인지 살펴보느라 괜히 경계심을 가지고 작품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이 약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웨그만은 바이마라너가 가면무도회를 통해 보여주는 전통적인 영적 관습을 대형 폴라로이드로 인간 같이 잘 담아내었다. 특히 제목부터 위트가 넘치는 <안경 Eyewear>은 인간의 눈만 오려서 강아지의 눈에 붙여 놓아 기괴하면서도 가면을 써서 정체를 숨기는 모습을 적절하게 보여주었다.
웨그만의 뮤즈인 바이마라너 말고도 빼놓을 수 없는 대형 폴라로이드는 그의 작품과 반려견을 한층 특별하게 만든다. 폴라로이드는 강렬한 색상과 즉시성이라는 특성이 있는 만큼 즉흥적이고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다. 즉, 폴라로이드로 제작된 작품들은 그 자체로 원본이며 합성은 없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활발하고 뛰어놀기 좋아하는 강아지가 포즈를 잡는 한순간을 흔들림 없이 잡아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후보정할 수 없는 트럭에 실어 옮기는 대형 폴라로이드로 말이다. 그만큼 준비 시간이 길고 촬영 시간은 짧겠지만,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웨그만과 그의 반려견의 끈끈한 유대감일 것이다.
대형 폴라로이드로 찍은 작품들은 사진이 찍힌 바깥 부분에 잉크가 번져있는 아날로그 느낌이 난다. 반들반들한 표면에 바이마라너 털의 윤기가 그대로 보여서 하나하나 그린 것 같이 느껴진다. 탄탄한 근육질의 피부를 비추는 사진 속 조명 덕분에 피부의 탄력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폴라로이드 시대가 저물어 최근에는 디지털 사진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리터치를 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은 합성한 게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강아지가 사람처럼 카메라 앞에 있기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의심이지만 반려견의 눈높이에 맞춰 렌즈를 조정하고 촬영 시간 동안 바이마라너의 상태를 살펴보는 등 웨그만의 배려를 떠올려보면 폴라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찰나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웨그만 : 비잉 휴먼》은 웨그만이 자신의 반려견을 찍은 초기의 대표 작품을 비롯하여 희소성이 높은 대형 폴라로이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점의 작품을 보여준다. 폴라로이드 사진의 경우 한 번 전시를 진행하면 한동안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니 이번 전시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올 것 같다. 더불어 지금까지 대중에게 공개된 작품 외에 작가가 직접 선정한 50점 이상이 국내에 처음 선보인다고 한다. 마크 제이콥스, 막스마라, 아크네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함께한 콜라보레이션 작품도 공개된다고 하니 관심이 있다면 가볍게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참고자료]
김지윤, “포즈는 그저 거들 뿐, 나는 ‘인싸 댕댕이’다…윌리엄 웨그만 ‘’비잉휴먼”, 네이버 공연전시 포스트, (http://naver.me/FrK2ysFW), 2021.08.28.
웨그만 월드, (https://wegmanworld.typepad.com/)
윌리엄 웨그만 공식 사이트, (https://williamwegman.com/)
윌리엄 웨그만: 비잉 휴먼 전시 도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