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여주는 것은 잊고, 머리가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세요”
아르헨티나 출신 설치미술가 레안드르 에를리치(Leandro Erlich)는 착시를 이용해 일상적인 공간을 새롭게 보여준다.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The Swimming Pool>은 관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는데, 수영장을 소재로 착시를 부르는 텅 빈 공간을 만들어 관람객이 물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외에도 탈의실, 정원 등의 친숙한 공간을 거울이나 프로젝터 등의 장치를 활용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감각을 선사한다.
한국에서는 2012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개인전,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한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대척점의 항구>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이번 <바티망>은 한-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 기념으로 7월 29일부터 12월 28일까지 노들섬 복합문화공간에서 전시한다.
전시 제목인 <바티망>은 프랑스어로 ‘건물’을 뜻한다. “영감의 한 부분은 공간의 규모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는 작가는 건물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듯하다. 실제로 사진 작품을 보면 집의 단면을 지면에서 들어 올려 전시한다든지 나무처럼 뿌리가 자라나게 한다든지 새로운 시각으로 건물을 탐색한다. 작가는 이러한 창의성을 작품으로 보여주며 관람객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의 도전을 요구한다.
<바티망>은 지난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개된 이후 18년간 런던, 베를린, 도쿄, 상하이 등 전세계 대도시들을 투어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어왔다. 이러한 인기는 작가의 작품이 관객 체험형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어서”라고 할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한 설명보다 관람객이 작품에 직접 들어가서 몸소 체험할 수 있기에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다만 착시로 인한 감각의 혼란은 작가의 의도이기에 이러한 순간을 마주한다면 작품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해보는 것이다. 작가가 도시 생활의 재미있는 요소들을 작품에 활용해 직접 보이는 현실을 새롭게 연출하면 관람객들이 작품의 완성에 도전하게 되는 시각을 경험하는 순서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참여형 설치 예술 작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점에서 시각뿐만 아니라 온몸을 사용한 총체적 경험이 될 수 있겠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 두 개 있었는데, <Building>과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이다. 전자는 건물 외벽 모양의 파사드와 거울로 구성된 대형 설치 작품으로 중력을 거스른 듯한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가가 정교하게 설계한 ‘트릭’은 거울의 반영을 통한 신선한 공감각적 경험과 함께 개념적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후자의 작품을 살펴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잃어버린 정원>은 유리창 너머에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주 보는 창에서 자기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창 앞에 선 내 모습은 일직선의 거울이 아니라 그 옆 혹은 그 반대에 상이 맺힌다. 내 앞에는 내 옆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반사는 반사된 물체로부터 나온다는 일반적인 현상을 뒤틀어 보다 확장된 공간에서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거울에 현혹된 것처럼 혼란스러운 반영물은 작가가 질문하고자 했던 개념들 ‘주체와 타자’, ‘환영과 실재’ 등을 일깨운다. 감각 자체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레안드르 에를리치의 작품은 모두가 알 수 있는 형태에서 주제를 유추하고 쓰임새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특별한 시선은 일상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뒤틀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감각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경험을 선사하는 작가의 작품을 노들섬에서 만나보는 건 어떤가?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를 피해 선선한 저녁에 가면 노들섬의 아름다운 풍경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