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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애 Aug 21. 2021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by 존 버거 (John Berger)

ways of listening 을 떠올렸다 먼저. 

내 반려인은 포르투갈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6년째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음악 장르는 즉흥/ 실험음악인데, 그 뿌리에는 즉흠 음악 1.5세대인 그의 아버지가 있다. 2대가 함께 유럽 곳곳을 투어하며 이 신선하고 엉뚱하고, 얼핏 누구나 할 수 있을것 처럼 들리는 이 음악에는 동시대 음악/ 듣기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시선이 담겨있다.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고 존 버거가 말했다면, 누군간 다른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고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improvisation 즉흥의 세계는 다원적이고, 복합적이며, 자유롭다. 특정 멜로디, 악보, 사운드를 넘어선다. ways of listening으로 즉흠 음악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존 버거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는 예술 비평가이자, 작가이자, 그 스스로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는 예술가였다. 


이 책은 1972년 BBC 4의 4부작 다큐 시리즈를 만든 후에 책으로 정리되어 나오게 되었는데, 그래서 책 제목과 다큐 시리즈 제목이 동일하다. Ways of seeing. way 가 아니라 ways, 복수로 쓰인 것에 시선이 간다. 4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과거 예술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지는 상징성과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하고 비판한다.   


존 버거는 현대인이 과거 예술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중요한 사건이 바로 카메라의 발명이라고 말한다. 카메라의 발명으로 인해 존 버거는 우리가 더 이상 과거 미술작품에 내재한 사회적, 문화적 관념과 신비화가 갖는 모순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결국 실재하는 이미지가 작품의 가치를 높이는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우리의 관점,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때문에 과거의 작품들이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 의미가 아니라면,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 심지어 하나의 중심을 넘어서서 카메라로 다 표현이 가능한 오늘 날에도 근대 미술 작품이 감상 가치를 지니는 것이 가능한 것이 왜 그런지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존 버거도 언급했다시피, 국립 미술관이나 근대 미술관에서 수천, 수만 작품에 압도되어 나의 무지를 갖고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래서 때론 우린 학습된 지식과 감각적으로 우리가 보는 작품에 대한 주체적인 감상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논점 중에 여성으로서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여성의 벗은 몸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화엔 여성의 벌거벗은 몸이 자주 등장한다. 그 인식에서 나아가 버거는 발가벗음과 누드는 다르다고 말한다. 벌거벗은 몸 naked가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대상으로 보이는 것 a way of seeing 은 그것이 누드화가 되는 것이다. 누드화는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보는 것임에 반해서, 벌거벗음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몸이 섹슈얼하게 비춰지는 것은 그것이 누드화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남성인 화가의 시선과 욕망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것을 보는 관객들로부터 같은 인상을 불러 일으키도록 만들어진다. 벌거벗음으로 모델을 그리는 것은 화가의 개인적인, 친밀한 감정과 관계가 스며들어서, 관객이 모델을 감히 대상화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그는 설명한다. 아, 여성이여. 이 부분에서 난 항상 사진을 찍으면 자동반사적으로 김치 브이와 환한 미소를 짓는 나를 되돌아봤다. 내 미소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떤 기대에 기반한 것인가? 어떤 의무를 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것은 수동적인 것에 반해 보는 것은 능동적이다. 한나 아렌트의 그리스적 표현을 빌리면 'viva activa' 즉, 능동적 삶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한 사회에 존재하도록 하는 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 능동성엔 끝이 없는데, 무엇보다 그 출발은 전통적 관점, 상하 구분이 뚜려했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버거의 글을 보며 생각한다.  


이 책에선 그 외에도 광고 이미지 이면의 심리학과 유화와 광고 이미지의 연관성과 차이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광고는 흡입력이 좋기에 위험하다. 우리를 무비판적으로 어떤 환상과 이미지를 마치 우리의 현실인 것처럼, 또는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조장한다. 그 '상품'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이 유화를 제작하고 주문 할 수 있었던 중세나 근대 시대 귀족 또는 부르주아와 복제 가능하고 대중을 타겟하는 광고 이미지의 차이라고 버거는 말한다. 평소에도 난 광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어필하는 광고는 유니세프, 국경없는 의사회 등 현실이라고 역시나 믿기 힘든 지구 어딘가에 일어나고 있는 빈곤, 결핍, 전쟁과 같은 것인데, 그 마저도 현실 그 자체보단 보는 이로서 어떤 행동과 감정을 유발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다. 광고에 주의하자! 


그럼 이런 버거의 분석과 관점이 '다르게 듣기'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보기와 유사하게 음악 역시 '어디서' 들을 수 있는가에 전통적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 오페라, 뮤지컬, 클래식 등 관객석 등급이 명확히 나눈 콘서트홀에서 듣는 음악은 분명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동경하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의 음악은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심지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시대 여러 작곡가의 운명은 그렇게 비슷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린 어떤 음악을 누구로부터 듣는가?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는 당시의 감상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의식하여 또 학습된다. 새로운 귀로 음악을 듣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진이, 카메라가 기존의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면, 오늘 날 디지털 음원과 유튜브, 그보다 이전에는 mp3 기기, 워크맨, 씨디 플레이어, 카세트 등이 복제 음악을 가능하게 했다. 새롭게 듣기는 주변의 모든 소리에서 능동적으로 하모니, 불협화음, 작동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학습화된 방식으로 들을 때, 소음은 음악이 되지 못한다. 소음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건 자연스러운 것인가? 어쩌면 본능과 감상 사이 어딘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즉흥, 또는 실험음악은 도전적이고 급진적이다. 우리의 듣기 능력을 시험하고 새로운 해석과 경청을 요구한다. 이것이 듣는 이에게 주는 자유로움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 특정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도록 요구하는 반면, 즉흥&실험음악에서의 감상은 전적으로 듣는 이의 감상과 감성에 달려있다. 매번 다른 것 같지만 뮤지션마다 해석하고 흡수하고 방출하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 특정 뮤지션의 스타일과 성격을 그의 즉흥 음악을 통해 알아가고 배우는 재미가 제법 있다. 우리의 귀에 새로운 자극을, 우리의 해석에 광활한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 즉흥 음악이 주고자하는 철학적 메세지일 것이다. 이 역시 능동적 듣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즉흥 음악의 콘서트와 공연 역시 도전적이고 흥미롭다.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의 반응과 감상은 공연 내내 뮤지션에게 영향을 준다. 관계적인 듣기인 것이다. 


과거의 전통과 관습, 유산을 잃지 않으면서 오늘 날 사회의 맥락과 개인의 역량과 창의력을 그만의 방식으로 분출하는 것. 그것이 보기든 듣기든 만지기든 모든 감각고 경험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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