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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마(Kiama) 여행 2

시드니 근교 여행 2

by 지안

오후 두 시쯤. 처음에는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본격적으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차에 몸을 싣고 출발했다. 나는 키아마를 빠져나와 울릉공(Wollongong)으로 향했다. 사실 이번 당일치기 여행의 주요 목적지는 키아마와 피규어 8 풀(Figure 8 pool)이었고, 울릉공은 그저 키아마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도시라서 따로 관광지를 많이 찾아보지는 않은 상태였다. 네이버에 검색하니, 등대 하나가 유명하다고 하여 그것만 보고 갈 작정으로 차를 몰았다.


30분 정도 운전하니 금방 울릉공 등대에 도착했다. 확실히 관광지이기는 한 지, 주변에 주차할 곳이 없이 차가 가득 세워져 있었다. 근처를 몇 분 빙빙 돌다가 마침 빠져나가는 차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주차할 수 있었다.


등대는 꽤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변은 작은 녹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앞바다에서 들리는 파도소리, 푸른 녹지와 흰 등대의 조합은 꽤나 상큼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반절정도 잡아먹어버려서 꽤나 아쉬웠다. 녹지에는 독특하게도 녹이 슨 대포들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뱃길을 알려주는 곳이자 방어기지였나 보다.


울릉공의 등대. 대포가 함께 보인다. ©Jian
울릉공의 등대 뒤쪽으로 펼쳐진 녹지와 해변 ©Jian


등대 관광을 마치고, 가까운 곳에 전망대가 있다고 하여 전망대로 이동했다. 풍경은 제법 좋았으나, 역시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울릉공 전망대. 구름이 없었다면 더 예뻣을 것 같다. ©Jian


전망대에서 내려와 간단히 끼니를 때울 생각으로 근처 맥도널드에 들렀다. 시간은 벌써 네 시. 마지막 남은 피규어 8 풀(Figure 8 pool)을 시간 내에 볼 수 있을지 의문이 슬슬 들었다. 차의 반납시간은 밤 10시였는데,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까지 채워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넉넉지는 않을 것 같았다. 햄버거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다시 차에 올랐다.




피규어 8 풀(Figure 8 pool)은 해안가의 암반 지형 중에 침식으로 인해 원형으로 구멍이 나게 된 곳에 바닷물이 차올라 생기는 풀(물이 고인 수영장 같은 곳)이다. 원 두 개가 위아래로 겹쳐 생겨날 경우 숫자 8과 비슷한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수영이 가능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라고 알고는 있는데, 날씨가 이런데 관광객이 있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점점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에 구글맵 내비게이션에 피규어 8 풀을 검색하니, 근처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 왜 목적지로 바로 안내하지 않지? 싶어서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피규어 8 풀로 바로 뚫린 도로가 없었다. 앗,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하지만 시간이 없다. 우선 어쩔 수 없이 주차장 방향으로 출발했다. 끈적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핸들을 잡은 손으로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쁘게 운전하기를 한 시간 여,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산길은 포장되지 않은 자갈길이었고, 관리가 잘 되지 않았는지 이곳저곳이 패어있어, 도저히 속도를 내서 달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흔들거리며 안 쪽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주차장을 찾을 수 있었다. 차를 대고 근처의 안내판을 살펴보니, 피규어 8 풀까지 가는 길이 대략적으로 표시된 지도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옆에는 거리가 나와있었는데, 이곳에서부터 약 3.5km, 왕복으로는 7km 거리였다. 산악길임을 고려하면 왕복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그러니까 피규어 8 풀은, 하루종일 트레킹을 하고 가서 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잠깐 시간을 내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주차장 앞 안내판 ©Jian


나는 안내판 앞에서 약간 고민하다가, 일단 출발해 보기로 했다. 시간은 벌써 6시. 호주의 3월은 가을이지만, 다행히 아직 서머타임 기간이므로 일몰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아 보였다. 서둘러 가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해서 사진 한 장쯤은 건질 수 있겠지.


트레킹 코스 초입은 말 그대로 산이었다. 좁은 산길은 돌과 나무뿌리 사이를 이리저리 굽이쳐 뻗어있었고, 경사도 결코 평탄치 만은 않았다. 빗줄기가 약간 더 굵어졌고 어느새 겉옷이 거의 다 젖었다. 우산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아냐, 이런 산길에서 우산이 무슨 소용이랴, 오히려 넘어질 위험이 컸을 것이다.


산을 20분 정도 타서 내려오니, 철판 바닥과 철망 난간으로 된 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높은 나무들은 자취를 감췄고 비교적 키가 작은 나무들과 무성한 풀이 가득한 낮은 언덕으로 넘어왔다. 이때부터는 풀숲의 높이가 낮아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파도가 끊임없이 치고, 날이 이미 꽤 어두워져 되려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언덕에서 바라본 해변. 저곳을 모두 가로지른 뒤, 두 곳의 암반지형을 통과해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Jian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난데없이 무성한 풀숲 사이로 껑충, 사슴이 튀어나왔다. 사슴인지 노루인지 고라니인지 뭔지 어두워서 잘 분간이 되지는 않았는데(물론 밝다고 분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녀석은 나를 보더니 다시 풀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 시간, 이런 날씨에 여길 내려오는 인간이 있다니, 녀석도 호기심이 동했나 보다.


다시 하산하기를 10분, 드디어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의 파도는 여기까지 내려온 인간이 한심하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모래사장을 때리고 있었다. 비는 점점 거세져 이제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착한 해변에서부터 목적지인 피규어 8 풀까지는 아직도 20분 정도 더 걸어야 했다. 어차피 옷도 신발도 모두 엉망진창이다. 여기까지 내려온 것,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끝가지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이 단순히 모래사장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10분 정도를 걸으니 모래사장은 없어지고 본격적으로 암반지형이 나타났다. 비와 파도를 맞아 미끄러워진 바위는 너무나 위험했고, 심지어 한쪽이 절벽으로 완전히 막혀서 너무 좁았다(파도 때문에 수위가 높아진 탓도 있었겠다). 곳곳에 웅덩이가 있고 까딱하면 옆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길을, 최대한 물을 피해 곡예사마냥 살짝살짝 뛰면서 걸었다. 저 멀리 목적지가 눈에 보였다. 10분만 더 걸으면, 정말 도착할 수 있다. 이제 정말 눈에 보이는 거리야.


그러다 한 번, 바로 눈앞으로 큰 파도가 덮쳤다. 파도는 암반 위를 청소하듯 길 전체를 하얀 거품으로 쓸어내렸다. '한 발자국만 더 갔으면 저 파도를 맞고 넘어졌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번쩍 현실감이 찾아왔다. 시간은 이미 6시 40분이 되었다. 구름 뒤의 해는 거의 다 져서, 저 멀리 땅거미가 올라오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내려 옷이고 신발이고 쫄딱 젖어버렸고, 바지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파도마저 거세게 쳐 너무 위험했다. 피규어 8 풀에 도착한다 한들 뭘 할 수 있지? 이 날씨에 수영을 할 수 있나,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나.. 나에게 남는 것이 하나 없네. 결국 나는 눈앞에서 목적지를 포기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고생한 만큼 새로운 경험이 내 성장의 양분이 되었을 거라는 자기 위로와 함께.


피규어 8 풀(Figure 8 pool) 가는 길의 암반지형. 파도가 계속해서 쳤다. ©Jian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Jian


돌아가는 길은 (오르막길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빨랐다. 그냥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해변을 지나 언덕을 올라 산속으로 들어오자, 완연한 어둠의 장막이 내렸다. 나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산길을 올랐다. 배터리가 남아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를 타고 산길을 빠져나갔다. 들어올 때 보다 조금 더 속도를 냈고, 비포장 자갈길은 올 때보다 조금 더 흔들렸다. 자갈들이 튀어올라 차에 부딪히자 텅, 텅, 공허한 소리가 났다.




산길을 빠져나와 서둘러 운전해 시드니로 돌아왔다. 다행히 차 반납시간에 늦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속도로를 타고 공항 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마침 주유소를 발견해서 차를 세우고 기름을 가득 채웠다. 주유를 끝내고 차를 바로 옆 주차장으로 옮겼다. 시간이 약간 남을 것 같으니,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차에서 조금만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운전석 좌석을 살짝 뒤로 눕혀 잠시 눈을 감았다.


1분쯤 지났을까. 천둥 치듯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번쩍거리는 불빛을 뿜어내며 분홍색 버스 한 대가 주유소로 들어왔다. 이게 뭐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버스가 정차했고, 술 취한 청년들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렸다.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손에는 술컵과 담배를 쥐고 있었다. 몇몇 남자애들은 주차장 앞 공터에서 노상방뇨를 했고 몇몇은 주유소 안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떤 여자는 버스에서 내려 구토를 하기 시작했고, 또 몇몇은 그 여자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떨었다.


나는 도대체 뭔가 싶었다가, 굳이 이 사람들을 마주해서 좋을 것 없을 것이라는 강한 직감으로 밖에서 보이지 않게 끔 의자를 뒤로 더 눕혔다. 괜히 눈에 띄어 시비라도 걸리면 골치 아파질 것 같다. 슬쩍 곁눈질로 버스를 보니 'Pink Party Bus'라고 쓰여있었다. '버스에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파티를 하는 것인가? 옛날에 한국에서도 있었던 관광버스처럼?', '그런데 왜 굳이 여기에 정차해서 난리를 피우는 거지?', '혹시 마약쟁이들이 가득 탄 걸까?'


온갖 잡생각이 머리에 들었다. 행동거지를 보면 아무튼 정상인들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이들이 모두 떠난 뒤에 다시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더 깊숙이 좌석 안으로 몸을 말았다. 괜히 저들의 관심거리가 되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10분쯤 지나자 버스는 다시 청년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버스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차에 시동을 걸어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버스에서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한다. 회사에서 버스와 기사를 지원해 주고 안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파티를 열 수 있다고 한다. 별게 다 있구나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 근처의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해, 9시 반쯤 차를 반납할 수 있었다. 친절한 직원이 나와 차 여기저기를 보고 반납을 도와주었다. 나는 차를 처음에 렌트할 때 주행거리 제한이 없는 옵션을 선택했기 때문에, 딱히 사고 난 흔적이 없고, 기름만 가득 채워져 있다면 큰 문제없이 반납할 수 있었다.


반납 관련 서류에 서명을 하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내 차를 검사한 직원 두 명이 작게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얼마나 탔어?"

"300km... 하루에."

"Oh, wow..."


좀 멀리 다녀오긴 했나 보다.




사무실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이동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따뜻하게 샤워를 마치고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피로에 잠겨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Cover photo by Manny Moreno of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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