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영화 감상문
페르시아어 수업이라는 영화를 보는데, 도저히 조마조마 불안해서 진도를 못나가겠네. 40분 보다 멈춤. 좀 쉬었다 낼 봐야겠다.
(그 내일 아침에 마저 보고 스포일러 쩌는 감상을 아래에 추가합니다)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을 보는 내내 조마조마한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거짓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언제든 들킬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유대인 질은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페르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언어를 창조해야 하는 그 순간순간이, 마치 무대 위에서 대본 없이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처럼 아슬아슬했다.
작은 실수 하나라도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고, 코흐 대위를 포함한 독일군 장교들은 언제든 그의 말에서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불안함이 너무 커서 영화를 한 번에 쭉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느끼는 이 불안은 질이 느꼈을 그것에 비할 바도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잔혹한 역사 속에서 한 유대인이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이 결국 진실을 지키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영화의 배경은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 벨기에 출신의 유대인 질은 독일군에게 붙잡혀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페르시아어 책을 소지하게 되었고, 순간적인 기지로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운명이 아이러니하게도 작용한 순간이었다. 마침 수용소에 있던 코흐 대위는 전쟁이 끝나면 페르시아, 즉 이란으로 가서 레스토랑을 차릴 계획이 있었고, 그는 질을 살려두고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질은 페르시아어를 전혀 모른다. 이제부터 그의 생존은 오직 즉흥적인 언어 창조 능력에 달려 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놀라웠다. 처음에는 무작위로 단어를 조합했지만, 곧 그는 수용소에서 처형당한 유대인들의 이름을 차용하여 단어를 만들어냈다. 페르시아어라고 주장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이 숨겨져 있었다. 이 설정은 단순한 트릭을 넘어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품고 있다.
코흐 대위와의 관계는 점점 복잡해진다. 그는 단순한 나치 장교가 아니라,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질과 수업을 하며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것이 그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고, 그는 점점 질을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뢰가 깊어질수록 질의 거짓말은 더욱 위험해진다.
코흐 대위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허점과 야망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누구나 그렇겠지, 그 구성비와 성질이 다를 뿐) 그가 페르시아어를 배우려는 이유는 전쟁 이후의 삶을 꿈꾸기 때문이지만, 그 과정에서 질을 ‘스승’으로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미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영화는 질의 심리뿐만 아니라, 코흐 대위의 심리도 면밀하게 조명한다. 그는 자신이 학살자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의식하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연결을 갈망하는 모순된 존재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는 여전히 나치 장교이며, 언제든 질을 죽일 수도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불안정한 관계의 긴장감이다. 코흐 대위가 점점 질을 신뢰하는 동안, 다른 독일군 장교들은 질을 의심한다. 그의 거짓말이 탄로 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그가 수용소에서 가르쳤던 '페르시아어'는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그 단어들 속에는 실제 사람들이 존재했다. 질이 창조한 2,840개의 단어는 모두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보존하는 일을 한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질은 이 단어들을 한 개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지켜낸 것은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학살된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가짜 언어가 진짜 역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단순한 생존 스토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언어의 힘, 기억의 가치, 그리고 권력 아래 놓인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다. 질은 거짓을 통해 살아남았지만, 그 거짓말은 결국 가장 중요한 진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영화는 '언어'라는 것이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기억과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나치의 학살 앞에서 질은 전투를 벌이지도, 총을 들지도 않았지만, 그가 창조한 단어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작은 저항이었다. 이는 역사적 망각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잊혀지는 것은 너무나도 많지만, 질이 기억하는 2,840개의 단어는 그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다. 질의 창조적인 기지는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니라, 결국 역사적 증언으로 남게 되는 과정 그 자체가 된다. 그가 남긴 ‘언어’는 수용소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흔적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전달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영화 말미에, 신분을 세탁한 대위가 이란 입국심사대에서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장면을 보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처지를 동정했다. 순간 그런 나에 대해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혹시 내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너무 무지한 채로, 그를 동정한 것은 아닐까. 그는 나치 장교였고,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시스템의 일부였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 했던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아니, 내가 그렇게 보았다.
전쟁이 끝나면 이란에 가서 레스토랑을 차리고 싶다는 그의 꿈은, 그의 행적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이 어리석고 뻔뻔한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생존 본능이었을까.
영화는 실제로 볼프강 콜하세의 단편 소설 ‘언어의 발명’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실화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