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자였다가 피실사자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지난 2월, 우리 공장은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의 해외 실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실사자의 요청과 검토 상황을 조율하며 실사 진행을 돕는 'facilitator' 역할을 맡아 긴장과 집중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실사에 임했습니다. 작년에 몇 차례 자율점검을 통해 감각을 다듬었던 덕분인지 큰 혼란은 없었지만, 역시 실전은 다르더군요. 공교롭게도 이번에 저희 공장을 방문한 주실사자들은 모두 GMP 실사 경력이 20년을 훌쩍 넘는 베테랑들이더군요. 실사자들의 경력을 알고 나니 특별히 긴장감이 남달랐습니다.
실사를 받으면서 문득 10여 년 전 GMP 실사를 위해 여기저기 출장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실사조는 주실사자와 부실사자로 구성됩니다. 주실사자는 전체 실사의 방향과 결론을 책임지고, 부실사자는 일부 파트를 맡아 문서를 확인하고 관찰한 사항을 정리합니다. 당시 주니어 연차였던 저는 주로 부실사자로 실사에 참여했습니다.
연구직이었던 저는 품질관리 부분을 주로 맡아 검토했습니다. 대학원 전공이었던 합성 분야 실험실 경험과 지방청 분석실 경험, 그리고 품질심사 경험을 바탕으로 시험성적서나 밸리데이션 자료가 기준에 맞게 작성되었는지를 중심으로 검토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시스템 전체를 보는 시야보다는 체크리스트에 맞춰 확인하는 데 집중했었던 것 같습니다.
피실사자 입장에서 실사를 겪으면서 저는 실사자였을 때와 다른 점 세 가지를 느꼈습니다. 오늘은 이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실사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QMS(일탈, 변경관리, 불만, 회수 등)에 대한 검토를 실사 초반부에 집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장에서 제품 생산과 품질관리 방법을 세팅한 이후,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통해 그 회사의 GMP 수준을 파악하려는 접근 방법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실사자로 참여했던 실사에서는 제조공정과 시험법 같은 제품 중심의 실사에 익숙했기에, 이 흐름이 처음엔 낯설얶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품 자체보다도 그것을 다루는 '시스템'이야말로 그 회사의 품질관리 ‘내공’을 볼 수 있는 지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조공정이나 시험법은 연구소와 공장이 함께 오랜 시간을 들여 구축하고, 규제기관은 이를 CTD 문서 등을 통해 역시 장기간에 걸쳐 심사합니다. 하지만 GMP 실사는 그런 문서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운영되는지를 제한된 시간 안에 파악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노련한 실사자일수록 ‘제품’보다는 ‘시스템’의 신뢰성을 우선적으로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외 실사는 특히 언어 장벽과 시끄러운 현장 분위기 탓에 문서를 깊이 있게 정독하거나 시간을 들여 깊게 통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실사자는 현장과 문서를 빠르게 검토한 후 담당자에게 핵심을 질문하고, 구두 답변이나 실적물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실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제가 실사자로서 해외 실사를 나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문서를 살펴보다 답답하면, 제 옆에 앉아 있는 담당자에게 질문 공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사를 받는 입장이 되어 보니 실사 현장이 얼마나 빠르게 피로가 쌓이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는 공간인지 더 잘 체감했습니다. 그리고 실사자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해서 전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도요.
미리 전달받은 실사 agenda가 있더라도, 실사자의 스타일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실사 상황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facilitator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Facilitator는 실사의 흐름을 파악해 실사자가 원하는 답변 전달을 명확히 하고, 실사자가 에너지를 집중해 쓸 수 있도록 유도하는 등 상황을 매끄럽게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야만 합니다.
실사자였을 때는 실사 결과로 도출된 지적사항의 경중보다 그것이 '규정적으로 타당한가'를 우선으로 판단했습니다. 메이저든 마이너든, 또는 단순한 권고사항이든, 해당 판단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지를 우선 검토했습니다. 실사 결과가 좋든 나쁘든 간에, 그냥 실사자가 해야 할 일은 해낸 '결과물'일 뿐입니다. (돌아가서 보고서 쓸 일이 더 걱정이었죠.)
하지만 피실사자가 되어 보니 실사 결과의 경중이 피부에 더 직접 와 닿습니다. 실사가 지적사항 없이 마무리되거나 큰 CAPA가 필요 없는 수준에서 마무리되면 그것은 조직이 이루어 낸 명백한 '성과'로 여겨집니다. 여기엔 실제로 유·무형의 보상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이런 보상은 동기부여로 이어지고, 팀워크를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이렇게 실사 결과를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때는 실사를 '지도·점검'처럼 임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10년도 넘은 과거에 실사했을 땐 제약회사가 문서를 급조하진 않았는지, 허가사항대로 제대로 만들고 관리했는지, 심지어 서명이 제대로 되었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실사하던 때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의 GMP 수준은 그런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특히 PIC/s 가입을 전후해서 그렇습니다. GMP 준수를 단순히 '규정 위반 여부'의 관점에서 보는 수준을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품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이런 '레벨업'이 어느 날 뚝딱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산과 리소스가 늘 빠듯한 건 공무원 조직뿐만이 아니더군요. 민간 회사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품질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사자와 피실사자로 다른 두 입장을 모두 경험하고 나니, 예전엔 보이지 않던 관점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역시 뭐든지 직접 경험해봐야만 시각이 넓어지더군요. 실사자일때와 피실사자일때 모두 실사는 늘 긴장의 연속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 경험치가 착착 쌓이는 것이 무척 값지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저는 피실사자로서의 경험을 쌓을 수 있겠지요. 더 많은 배움을 통해 입체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좋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