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
제약 공장에 약사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왜일까요? 공장은 어둡고 힘들다는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고, ‘GMP’라는 까다로운 규칙 속에서 일하다 자칫 면허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부담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고요. 공장엔 규칙이 많긴 하지만, 그만큼 체계적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오히려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 배워야 할 점도 명확하고, 처음엔 복잡하게만 보이던 규정들이 어느 순간 “이래서 필요한 거구나” 하고 이해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공장이라는 공간이 덜 낯설고, 오히려 성장하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오늘은 약사(특히 새내기 약사)들이 공장에서 일해봤으면 하는 이유 세 가지를 말해보려고 합니다.
예전엔 ‘면허만 걸어놓는 약사’라는 표현을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약사감시 현장에서 그런 약사들을 종종 보기도 했습니다.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이름만 올려놓는 경우 말이죠. 물론 결정적인 순간엔 책임을 피할 순 없겠지만 저는 그렇게 일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약사 스스로 역할을 줄여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공장에서 제조관리자로 일한다는 것은 약사라는 이름을 실무에 제대로 녹여낼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년이긴 하지만 제가 그동안 그간 현장에서 일하며 느낀 건, ‘이 자리가 그냥 형식적인 게 아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문서 하나하나 서명을 하며 책임을 지려면 내용을 이해해야 하고, 문제가 생기면 답을 낼 수 있어야 하니까요. 가끔은 업무량과 책임 범위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공장에서 약사의 자리를 공고히 만드는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직능을 지킨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거기서 따라오는 직업적인 자부심도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학부 시절 배웠던 ‘제제학’이나 ‘약사법규’ 같은 과목들, 달달 외우면서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별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했는데요. 공장에서 일하다 보면 예전에 배운 지식이 불쑥불쑥 연결될 때가 있습니다. “아, 그때 배운 게 이거구나"하고 되새기게 되죠.
처음엔 약사 면허만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일하면서 거기에 나만의 '전문성'을 얹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저는 이 “플러스 알파”를 만드는 과정이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장에서 약을 만들고 출하하는 업무는 거의 '종합예술'에 가깝거든요. 화학, 생물학, 미생물학이 기본이고, 심지어 가끔은 물리학과 기계공학까지 필요합니다. 한 가지 지식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거의 없고, 여러 학문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답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들이 하나씩 다시 살아나고, 이걸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기도 합니다. 그게 큰 보람이죠. “전공을 살린다”는 것이, 실제로 약을 만들고 품질을 보증하는 과정 안에 있으면 제대로 실감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공장에서 근무한다고 해서 근무지 내에서만 일하는 건 아닙니다. 해외 규제기관 실사나 파트너사 오딧처럼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이 때, GMP와 회사 상황을 설명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영어 소통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꼭 해외파가 아니어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죠.
물론 실사는 늘 긴장되는 자리이긴 합니다. 특히 '평가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한 번 서 보게 되면, 무척 많이 성장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실사를 받을 때 뿐만 아니라 공급업체 평가 때문에 인도나 중국 등 해외 공장을 오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로는 유럽이나 미국 같은 나라로 출장 갈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요. 이런 경험은 단순히 경력에 한 줄을 더하는 게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업무를 대하는 시야를 넓혀 주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공장에 막상 들어와 보면 배울 게 무척이나 많고, 하루하루 꽤 알차게 지나갑니다. 약사 면허를 기반으로, 꾸준히 전문성을 쌓으면서 커리어를 넓혀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요. (물론 지방 근무이기 때문에 조금은 고려해야 할 포인트가 있기도 합니다)
저는 조금 다른 길로 돌아 들어왔지만, 직접 겪어 보니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여긴 내 길이 아닐지도..?”라는 생각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성장하는 것도 느낍니다.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3년 뒤, 5년 뒤 제 모습이 어떨지 기대되기도 하고요.
많이 가지 않는 길에 기회가 있다고 하죠. 공장 약사가 바로 그런 길입니다. 후배 약사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공장도 충분히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요.
(표지이미지출처=대한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