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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4. 2023

가을 우체국 앞에서

[풀하우스]15

아, 네. 다 좋고요. 좋아요. 그런데 요거 수치가 검사한 이후 처음으로 2를 넘었네요. 못 주무시나요? 안 드시나요? 바나나에 우유 한잔이라도 꼭 공복을 만드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루에 적어도 일곱, 여덟 시간은 주무셔야 합니다. 주치의가 가리키는 마우스 커서 끝에 요거 수치는 Bilirubin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년 2월을 다시 예약을 하고 광장 시장 같은 병원을 나섰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지하주차장까지 몇십 미터를 뛰었다. 


지난 주말. 열흘 가까이 수경 재배를 하던 바질 펠렛. 10개 중에 8개의 씨앗이 싹이 되어 쏙쏙 올라왔다. 끝까지 기다린 두 개는 초록잎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나한테 온 씨앗 10개는 포장지 겉면에 쓰여있는 평균 발아율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무리들이었다. 한 달 전쯤 미리 사다 준비해 두었던 세 개의 황토 화분에 옮겨 심었다. 3개, 3개, 2개씩. 이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다. 



병원에 들렀다 늦게 출근한 어제. 늦은 만큼 아이들 상담도 늦어졌다. 아침 일찍부터 나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연신 톡에 전화에. 내가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밤 8시 가까이까지 아이들 접수를 도와주고, 특별전형 서류 발송 절차를 알려 주었다. 그러는 동안 바질은 화분에 옮겨 심은 지 나흘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봤어?라는 따님의 톡을 집에 도착해서 따님을 포옹하고서야 봤다.  


학교 진입로 좁은 골목. 옛날 골목이다. 좁고 삐뚤빼뚤. 하지만 십여 미터만 벗어나면 널찍한 도로가 나온다. 인도를 따라 주욱 올라가면 좋은 소식을 금방 물어다 주려고 쏜살같이 날아갈 것 같은 빨간 제비가 있다. 그 우체국을 향해 올라가는 인도 옆으로 아직은 여름인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지금 그 우체국은 이맘때가 되면 우리 학교 전담마크맨처럼 바빠진다. 하루에 두 번. 오전 10시, 오후 2시. 


특별전형 서류를 발송하려는 아이들이 늘어서 있다. 아이들 손에는 똑같은 누런 학교 서류봉투가 서너 개씩 들려 있다. 대입원서 접수 후 추가 증명서류를 우편으로 발송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낮에 잠깐 바쁘게 돌아가는 시장 통로 길가에 모여 있는 열여덟 무리들이 유독 샛노란 은행잎처럼 도드라져 보이는 건 빌리루빈 수치가 높아져서만은 아닐 듯하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 같이. 이 노래를 부른 유명한 가수가 오랫동안 암투병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다행히 한 달 전에 완치 판정을 받았단다. 같은 성에, 동갑이기도 하지만 노랫말 자체가 너무 좋은 노래들을 너무 많이 불러주어서 고마워하고 있는 가수다. 지방 공연도 아내와 같이 찾아갈 정도로. 


그런 그가 늦게라도 말을 꺼낸 이유가 역시 그 다웠다. 암세포보다 부정적인 마음이 더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새삼 새로운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이 표현을 실천하고 사는 건 분명 펠렛에서 화분으로 바질을 옮겨 심는 것만큼 쉽지는 않다. 그래도 풀들이 알려준다. 쉽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는 거라고. 그 차이는 손바닥 앞뒤 같다고. 


가만히 돌아 보니 우리집에 있는 모든 화분들에 새싹이 돋아나 있다. 벵갈 고무도, 여인초도, 야자수도, 스파티필름도, 임파첸스도. 그리고 내 곪았다 터진 내 손가락 끝 새살도 돋아나기 시작했다. 덥다, 비오고, 무지개 솟고, 바람불다, 햇살 가득해지는 시간 마다 다들 제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거다. 결국, 나만 밝고 맑고 긍정적으로 살아내는 일만 남아 있었던 거다. 언제나, 지금처럼. 

 

철망옆 농가에서 밤송이가 제법 굵직해져 안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그 아래에서 하늘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그런 나를 바람이 휘감듯 쓰다듬도 달아난다. 건조기에서 금방 꺼낸 타월같이 따듯하고 보드랍다. 그러면서 속삭인다. 이제 금방 그리워질꺼라고. 지금이, 그 사람이 그리고 내가. 바람에 흔들려야 더 단단하게 박힌다고. 떨어진 밤이라도 주워 맛나게 쪄 먹을 준비나 잘 하라고. 




--------(한 줄 요약)

가을은 노오란, 나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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