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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10. 2023

잃어버린 노를 찾아서

[동네 여행자] 13

아내의 불안한 눈짓 때문에 좀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듯했지만 한 시간 남짓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셋이서 나눠 마신 막걸리 3병이 온몸을 마구 달구었다. 우리 동네분이 아닌 듯 대리 기사는 네비를 흘기면서 어둑한 빗길을 천천히 달렸다. 집 근처에 가서는 네비가 가리키는 길이 아닌 빠른 길로 당부를 몇 번 더 해야 했다. 뒷자리에 앉아 아내가 그랬다. 별일 없을 테니, 따님 앞에서 티(?) 내지 말자고. 이것저것 알아보면 될 거라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집에 올라왔다. 따님이 맑은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펼쳤다. 하루 종일 고생 많았네, 하면서 한참을 안았다.


따님은 나에게 안긴 채 귀에다 소곤거렸다. 마치 엄마가 듣지 못하게 말하려는 듯. 아빠, 어떻게?  뭐? 아! 괜찮아. 이제부터 하나씩 알아보면 되는 거지. 일단 푹 자고 내일부터 시작(?)해보자, 하고 일부러 아내도 듣게 큰 소리를 내면서 짐짓 무심한 듯 대답을 했다. 눈가가 빨간 아내만큼 울음이 많은 따님도 그리고 아내도 울지 않았다. 아내는 집에 없는 아드님방에서 따님을 안고 같이 잠을 청했다. 나는 안방에서 잠들기 전 가장 가까운 A대학병원 홈페이지에서 초진 예약을 해두었다. 아침에 예약센터에서 연락을 준다는 메시지를 받은 뒤 잠자리에 누웠다.


술기운에 몸은 피곤한데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았다. 다시 몸을 일으켜 멜라토닌 한 알을 먹고 수면 테이프를 한 후 다시 누웠다. 몇 시간 뒤. 그냥 떠진 눈만큼 몸은 가벼웠다. 큰 병원들이 진료를 시작하는 아침 8시까지 네  시간이 남았다. 너무 많이 남았다. 기다려야 했다. 답답했다. 내가 병원을 하나 짓는 게 더 빠르겠다 싶을 정도의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쓰고 읽으면서 채우고 채우고 또 채웠다. 아침 8시가 넘자마자 집에서 가장 가까운 A대학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열댓 번의 시도 끝에 상담원과 통화. 결국은 12월 2일이 가장 빠른 예약이라는 답변만 받았다. 두 달 가까이 내 마음을 위태로운 난간 위에 걸어 놓듯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다시 수십 번 통화를 시도한 B대학 병원. 당일 접수도 다 마감되었다고만 했다. 오전 8시 30분쯤이었는데. 지루한 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몰랐다.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별일 없지, 가 얼마나 큰 위로이고 안부이고 격려이라는 사실을. 9시가 조금 넘어 다시 연락온 상담원을 통해 11월 5일에 일단 예약을 해두었다. A대학 병원보다는 한 달 더 빨라졌다. 하지만 한 달, 멀어도 너무 멀다. 다음은 C대학 병원.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달려가야 한다. 집에 있을 수만은 없어 그냥 그 병원을 향해 달렸다. 따님, 아내와 함께.


따님은 신생아 때 심장에 천공이 있게 태어났다. 산후 조리원에서 포대기에 싸안고 달려간 곳이 C대학 병원이었다. 수도권에 몇 군데 없는 신생아 심장 초음파가 가능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 병원에는 따님 기록이 남아 있어, 금방이라도 진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리적으로 스스로 안도하려는 내 생각이었다. 다행히 상담원과의 전화 연결이 가장 빠르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친절했다. 무엇보다 같이 걱정을 해주었다. 쌓였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내리려 했지만 참았다. 그 참은 눈물이 목구멍으로 밀려 들어갔는지 전화하는 동안 목이 잠겼다.


운전하는 나를 대신해서 C대학 병원에 연락처를 남기면서 옆자리 아내가 그랬다. D병원도 한번 가보자고. 그곳은 캐나다로 이민 간 서른 살 조카가 몸이 약했던 중학생 때 한 달 가까이 입원했던 곳이다. 그래서 몇 번을 아내와 같이 병문안을 갔던 곳. 대학 병원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아도 중급 병원이다. 그것보다 병원이 깨끗했고 의사, 간호사, 직원 할 것 없이 말 한마디가 너무 친절했다. 거대한 병원 직원들이 아닌 듯하게 느낄 정도로.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넘치지고 않으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라는 걸 금세 느낄 정도였다. 조카가 그랬단다. 동기 간호사들도 꼭 가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곳이 D병원이라고.  



오늘 안에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해결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마음이 기계한테도 들렸던 걸까. 네비마저 답답한 내 마음을 표현하는 듯했다. 네비는 D병원까지 13217km라고 알려준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차를 D병원으로 돌렸다. 조카는 한국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C대학 병원 중환자실에서 반년 가까이 근무를 했다. 그렇게 간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D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좋은 기억과 인연 때문이라고 아내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운전 중에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네비 밑으로 톡이 들어왔다. C대학 병원이었다. 상담원과 통화한 지 한 시간 남짓 흐른 오전 10시쯤이었다. C대학 병원에서 따님이 미성년이고 응급이라며 잡아 준 날짜가 10월 11일 오후 2시. 다시 한 달이 지워졌다. 온 우주가 고마웠다.


D병원 초진 예약 센터.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려 우리 순서가 되었다. 아내가 따님이 들고 온 전원서를 내밀었다. 그랬더니 접수하는 직원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상황을 상세하게 물었다. 그러면서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니터와 우리를 번갈아 보면서도 두 곳에다 전화를 걸어 소곤거렸다. 소란스러워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되는지 안되는지를 물어보는 것 같다, 는 생각을 혼자 했다. 그러는 내 마음을 읽은 듯 피부과, 외과 두 군데 다 연락을 해놨으니 기다려 보자고 했다. 보자고, 하는 말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반드시 연락 오리니, 하는 안도감을 주는 것 같았다.


정말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직원분이 일러준 대로 협진센터로 갔다. 번호표를 뽑자마자 따님 이름이 불렸다. 그렇게 무작정 달려간 D병원. 접수 직원과 협진센터의 직원 덕분에 다음날 오후 2시 15분 진료 예약. A대학 병원 두 달 뒤에서 C대학 병원 한 주 뒤. 그리고 D병원 내일. 네댓 시간 동안 일어난 기적이었다. 전혀 당연하지 않은 기적. 큰 병원을 다녀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다. 초진 잡는 것도 쉽지 않지만 초진 5분 정도 받고 이것저것 검사하는데 다시 몇 주, 아니 몇 달. 그리고 다시 결과 보러 가는데 몇 주는 기본이다. 따님이 얼큰한 샤브를 먹고 싶다고 했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 기분 좋게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음 날. 조퇴를 한 후 아내를 만나 집에 있는 따님을 데리려 또 달렸다. 아내는 많이 피곤해 보였다. 얼마 정도 걸리니 좀 눈을 붙이라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운전을 하면서 당신이 안 자면 나라도 눈 좀 붙일 거라고 농담을 던졌지만 아내는 웃지 않았다. 따님 얼굴도 매한가지였다. 차에서 햄버거 두 개를 셋이 나눠 먹고 도착한 D병원 외과. 2시 15분 예약이었는데, 밀리고 밀려서 3시가 넘어서 따님의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에는 보호자 1명밖에 못 들어간다고 해 아내는 진료실 밖에서 혼자 기다려야만 했다. 흔쾌히 나에게 들여가라는 아내는 입술에 단단하게 힘을 주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흔들렸다.


따님에게 배정된 담당의는 얇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까까머리에 가까운 젊은 남자 의사였다. 입보다는 눈으로 먼저 웃으면서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는 가장 먼저 따님이 손에 꼭 쥐고 있던 전원서 두 장을 받아 들고는 한참 들여다봤다. 몇십 초 정도 흘렀겠지만 며칠 동안 잠에 못 든 것 같은 피곤함이 밀려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머릿속에서는 다음, 또 다음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자꾸 끝말잇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밖에서 기다리는 아내가 얼마나 답답할까 하고 걱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멀뚱 거리는 따님과 애써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따님의 가지런한 정수리에서 자그마한 진료실 창밖으로 다시 담당의의 명찰을 지나 맞은편에 앉아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간호사의 오른 손목으로 시선을 옮겨 다녔다. 그제야 담당의의 이름과 전공과가 내 눈에 들어왔다. 소아청소년 외과의 전**. 그랬다. 어제 협진센터 직원한테서 들은 설명이었다. D병원에 외과 전문의가 셋이다, 그런데 소아청소년 외과의는 전** 한분이시다, 장기의 크기와 형태, 상황이 미성년들은 성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외과적인 수술을 해야 할 경우 소아청소년 전문의가 해야 한다. 어제는 그저 당장 내일 진료를 볼 수 있다는 안도에 그 말이 들리지 않았던 거 같다.  


돈이 되지 않는 외과 자체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전 국민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 외과 안에서 다시 소아청소년만 진료하는 전공의는 한반도에 60여 명 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내를 통해 따님 담당의가 만나기 어려운 젊은 명의라는 사실도. 그러는 사이 담당의가 등을 좀 봐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따님에게. 말투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참 정중하다, 는 생각을 했다. 아, 네 하는 대답뒤에 따님은 상의를 가슴 언저리까지 걷어 올리며 상체를 내 앞으로 숙였다. 담당의의 시선은 따님의 등에서 내 얼굴로 올라왔다 베이지색 벽으로 이어졌다. 그 벽 중간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온 신경을 손가락 끝에다 모으는 듯 시선도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아플 겁니다. 많이 아프면 이야기하세요 하면서.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1284 에서 이어집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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