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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02. 2021

하늘아 보고 싶어

잘운잘(잘먹고운동하고잘듣고)

  저녁에 잠들 때 아침에 일어날 때 어제와 오늘처럼 아주아주 부드럽게 연결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재난지원금 신청을 하고 누우려고 자정을 넘겨 기다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흘 연휴의 행복감에 어제는 평소보다 1시간 정도 늦게 침대에 누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란 통로를 빠르게 빠져 들어갑니다. 그 속도를 즐기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슈우욱하고 미끄러져 내려가 진공관 속 새하얀 침대 위로 사뿐히 내립니다. 동시에 모든 느낌이 제거되었습니다. 마치 내 몸의 수많은 램프들이 '팍, 파박, 팍' 하면서 일제히 꺼지듯이. 오감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아주 잠시 후. 오늘 아침이 일순간 열리더군요. 몸이 깃털 같다, 는 즐거움이 밀려왔습니다. 깊은 수면에서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새날로 일순간 빠져나왔습니다. 의식도 몸도 어떤 거부감 없이. 오감에 하나둘씩 램프가 다시 켜집니다. 목구멍으로 말려 들어간 듯 한 혀를 쭈욱 펴봅니다. 입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봅니다. 금새 따듯한 침이 목구멍을 타고 빈 공간을 흘러내립니다. 양팔과 다리로 이어진 혈관이 퍼드득 피부를 때립니다. 종아리 근육이 살짝 꿈틀거리면서 발바닥을 쫘악하고 펴줍니다.


  그때 '타다다 닥' 하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립니다. 점점 가까워집니다. 소리가 '다닥'하고 멈춥니다. 2-3초 뒤. 녀석은 작은 가슴팍을 일부러 밀어내듯이 앉아, 내 얼굴을 내려다봅니다. 하얀색에 둘러싸인 새까만 두 눈이 반짝반짝거립니다. 반려견 코코입니다. 내 상태와 관계없이, 아침마다 일어나는 작은 루틴입니다. 녀석은 작은 방에서 잡니다. 밤새도록 잠들지 않고 안방의 인기척을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어김없이 달려옵니다. 작은방에서 거실을 거쳐 안방으로 뛰어 들어와 전용 계단을 밟고 내 침대 위로 뛰어 올라옵니다. 폭신한 발바닥을 감싼 발톱이 바닥에 부딪히는, 신나는 소리입니다. 녀석의 가슴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립니다. 녀석은 스르르 눈을 감으며 촉감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오늘 아침에는 '오늘은 아주 가볍게 달릴 수 있겠어'라고 생각이 올라옵니다.


  큰 컵에 가득 물 한잔을 마십니다. 냉수 말고 정수로. 그러고 나서 가장 먼저 태클 밴츠를 입으면, 그날은 달리기를 하는 날입니다. 스스로에게 한 첫 번째 약속입니다. 몸과 생각의 점검이 끝났다는 시그널입니다. 몸이 무거우면, 오늘은 달릴 시간이 부족하면, 태클 팬츠를 입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러닝 반바지와 티쳐스를 입습니다. 러닝 밴드를 허리에 두르고, 헤어밴드를 착용합니다. 마지막으로 휴대폰하고  이어폰의 배터리를 확인합니다. 보통은 퇴근을 하면서 바로 거실 책장 위에 설치한 선반에서 늘 충전 중이어서,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집에 오면 휴대폰을 선반 위에 쭈르륵 나란히 올려놓습니다. 가족회의에서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한 약속을 실천하는 겁니다. 모두 집에 오면 되도록 휴대폰을 만지지 않기 위해서.


  옷을 다 챙겨 입고 휴대폰과 이어폰을 연결합니다. 휴대폰에서 달리기 어플을 실행한 후 'GO'를 클릭합니다. 그런 후 휴대폰은 허리 밴드가 넣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어플을 처음 사용해봤습니다. 계속 미밴드 달리기 어플을 사용하다, NRC로 바꾼 첫날입니다. 자동으로 파워송이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기본값으로 있는 음악이었네요. 미리 러닝 뮤직을 연결하지 않아 오늘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달렸습니다. 현관문을 닫은 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부터는 달리기의 시작입니다. 계속 제자리 달리기를 합니다. 가볍게, 가볍게.


  엘리베이터를 내려 온후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나란히 달리는 하천까지 이백여 미터를 천천히 걷습니다. 팔과 다리를 최대한 풀어 주면서. 공원을 지나면 열댓 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그 계단을 내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책로와 자전거길의 경계 부분을 달려 내려갑니다. 그러면 나만의 2번 코스, 10km 구간의 시작입니다. 새 어플은 킬로미터마다 누적 시간, 킬로미터당 시간을 목소리로 알려주네요. 2km, 3km.... 생각이 올라옵니다. '오늘, 몸이 너무 가벼운데. 10km는 충분하겠어.', '


  나에게 달리기를 할 때 생각을 한다는 건, 하루키의 이야기처럼, 오늘 머리 위에서 수없이 생겼다 사라진 구름입니다. 금방 뭉글뭉글 올라옵니다. 어떤 구름은 꽤 두껍습니다. 움직임이 두 다리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러다 앞에서 마주 달려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은 모두 마라토너가 아닌 동네 러너들이었습니다. '너무 잘 뛰는데?', '금방 멈출 것 같아' 하고 머릿속이 중얼거립니다. 그 순간 다른 구름이 뭉글거리면서 그 사람을 밀어냅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구름이 흘러가고, 흘러옵니다. 결국에 남는 건 파란 하늘뿐입니다.


  파란 하늘에 생각이 가 닿으면, 마치 내가 제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은 4km와 5km 사이쯤 되는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가 정해 놓은 2번 코스의 반환점입니다. 헤어밴드에서 똑  땀방울이 뒷목으로 떨어져 척추를 타고 미끄러지는 느낌이 기분 좋습니다. 이어폰으로 '둥, 둡, 둥, 둡'하는 비트가 흘러나옵니다. 모르는 가수의 모르는 노래지만, 반복적이고 강한 비트가 심장을 지나 허벅지에 닿습니다. 막 8km를 통과 중이었습니다. 킬로미터당 5분 47초의 속도였습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타이밍이 아주 절묘할 때가 있습니다. 힘이 들어 지쳐갈 때, 또 하나의 구름이 뭉글거리면서 올라옵니다. '그만 달리고 멈춰. 좀 걷자, 응?, 걷자고'하고 자꾸 외칩니다. 먹구름입니다. 보통 먹구름은 빨리 흘러가지도 않습니다. 그럴 때 때마침, 심장박동 같은, 규칙적인 비트가 흘러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살짝 숙여진 허리에 힘이 들어가 가슴을 더 쫘악 펴게 됩니다. 두 다리가 더 경쾌하게 땅을 박차고 나갑니다. 다리의 무게감이 덜 느껴질 때입니다.


  오늘은 유난히 호흡이 더 안정적입니다. 마스크 때문에 들숨과 날숨이 방해를 받지 않아 더 그랬습니다. 아내가 어제 새로 구입한, 지금까지 구입한 마스크중에 가장 비싼 거라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착용했습니다. 숨쉬기가 너무 편안했습니다. 오늘 달리기의 절반은 마스크 덕을 봤습니다, 분명. 그때,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전화 벨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속도를 살짝 줄이면서, 러닝 밴드 휴대폰 부분을 앞쪽으로 돌립니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아내였습니다.


"헉, 헉, 여, 여, 여보세요?"


"어, 어디야?".


  아내의 목소리는 잠겨 있습니다. 입술이 휴대폰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음절 음절 사이에 숨소리가 넘어옵니다. 그 숨 속에 잠이 묻어납니다. 하지만 참, 상쾌하게 가벼이 들립니다. 컨디션이 좋은 것 같습니다. 어제, 나보다 더 늦게 잠들었는데. 휴일 아침, 먼저 일어나 운동을 나가면, 아내는 가끔 이렇게 전화를 합니다. 대부분 반환점을 돌아 출발한 계단 근처에 거의 도착할 때입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안부 전화입니다.


"헉, 헉. 어. 달리기 중이야.  헉, 헉, 2KM 정도 남았어"


"으응"


  잠깐 잠이 깨서 주변을 둘러봤을 겁니다. 두 귀를 쫑긋해서 집안의 모든 소리를 들으려 했을 겁니다. 잠결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꿈이었다, 진짜 들었나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스르르 다시 잠들었을 겁니다. 아니면 코코를 만져주면서 아침을 시작하고 있을 겁니다. 나는 아내의 전화가 너무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잠이 묻어 있는 그 목소리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별일 없지?. 무리하게 뛰지 말고, 얼른 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얼른 아침 먹고, 바람 쐬러 가자. 응?'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내가 나에게는 수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감싸고 있는, 말없이 내려다보는 새파란 하늘입니다. 그래서 더 신나게, 즐겁게, 행복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10km를 1시간 이내에 뛰었습니다. 어플이 소리칩니다. 총 달린 시간 58분, 총 달린 거리 10km, 킬로미터당 5분 47초라고. 시작 때처럼, 몇백 미터를 천천히 달리면서 팔과 다리를 풀어줬습니다. 계단을 다 올라와서 뒤돌아 새파란 하늘을 한번 더 올려다봤습니다. 가슴과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느끼면서, 아내가 빨리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데 바로 볼 수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떡집에서 아내와 딸이 좋아하는 송편을 두팩 사서 들고 걸었습니다. 어릴 적 운동회 전날 밤 같은,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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