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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an 15. 2023

속도에 대한 이해

나와 당신을 응원합니다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 종종, 아니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심박하게 떠돌던 표현이 텍스트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폰을 가지고 노는 학생들에게서 처음 들었던 단어, 렉. 네 바로 그겁니다. 렉이 걸립니다. 게임에 열중인 학생들은 렉이 걸리면 눈동자를 희번덕 거리며 소리를 칩니다. 주변에게 자신의 속도를 알리는 겁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생각이 정체됩니다. 느려집니다. 물론 백번 중 한두 번은 생각지도 못한 표현이, 문장이, 단어가 뇌를 거치지 않고 마치 손가락 끝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써질, 쳐질 때가 있기는 합니다. 물론 전자라고 또는 후자라고 결과적으로 우선 내 마음에 그는 글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지요. 


오늘도 어제처럼 늘 가던 시각, 가던 길. 백번 중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시각에, 흡사한 모습으로 지나가게 됩니다. 안정, 안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비슷한 시각에 일어나고 비슷한 시각에 나서고 비슷한 시각에 움직이게 됩니다. 그저 욕심내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정직하게 살았다는(산다는) 많은 이들이 몸으로 기억하는 밥벌이의 시작이자 전부이니까요. 그러다 그 움직임 속에서 생기는 수많은 우연 중 인연을 만날 수도 있게 되니까요. 그런데 한두 번은 렉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금방 알게 됩니다. 이런, 사고구나. 아, 지게차. 오, 도로 연수중이구나 하고.


지금껏 만났던 대부분의 제자들은 매일 아침, 제시간에 잘 찾아옵니다. 10대이지만 벌써 몸이 잘 기억하게 연습된 훌륭한 청소년들입니다. 늘 비슷한 시각에, 비슷한 모습으로, 비슷한 자리에 앉습니다. 앉아서는 비슷한 행동을 합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책상을 티슈로 정성껏 닦아냅니다. 화장을 마무리합니다. 숙제를 합니다. 평가를 준비합니다. 통화를 합니다. 문제를 풉니다. 앉아마자 엎드려 잡니다. 아침도 먹고, 이야기도 나눕니다. 나의 움직임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렇게 내가 비슷한 시각에 교실을 돌아보듯. 있는 듯 없는 듯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이미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대척점 정도에 서 있는 것 같은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거의 매해. 분명 내가, 아니 나로 대변되는 조직에서, 행정적으로 보면 지각입니다. 규칙상 8시 몇 분까지는, 벨 소리가 끝나면, 교문이 아니라 입실 기준으로, 심지어는 내가 교실에 없어도 지각입니다. 그러나 본인한테는 엄청나게 일찍이라는 항변을 종종 합니다. 물론 기준은 내가 모르는 자신의 과거입니다. 작년보다는, 1학년때보다는, 중학생 때보다는 스스로 사람 되었답니다. 그럴 때는 꼭 나 때문에 그나마 일찍(?) 와주는(!) 거라고 눈을 찡긋, 어깨를 들썩거립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비슷하게 늦게 나타납니다. 귀엽습니다.  


월요일 9시부터 금요일 4시 반까지 보통 서른 개가 넘는 수업이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열여덟 남짓한 수업을 합니다. 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보입니다. 보인다는 건, 나뉜다는 의미입니다. 공부에 관심이 없고, 가족의 지원을 못 받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날 찾아오는 게 기특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서른 개가 넘는 수업시간이 이 아이들에게는 엄청난 고문이지요. 하지만 오바마 전 대통령도 그랬습니다. 한국은 고등학생까지 학교에서 돌봐준다고. 바로 돌봄 기능입니다. 그 시간에 학교에 와 있지 않으면, 먹고 사느라 바쁜 부모의 걱정이 두 배, 세배되는 걸 원천 차단해 주는 거지요. 통계상, 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들의 범죄율이 학교에 갇혀(?) 있는 아이들의 7배가 넘는 답니다.


물론 공부를 해보겠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가 나만 따라다니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진짜 기특합니다. 뭐라도 하나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지요. 하지만 아주 몇몇을 제외하면 그런 행동이 실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인성은 갖췄지만, 읽어 내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같은 내용을 읽어도 다르게 받아 들입니다. 아예 읽어 내지 못하는 아이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같이 가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들끼리 모이고, 서로 묻고, 따져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밥벌이가 그렇듯이 말이죠. 배우고, 익히고, 나누는 데 다 저마다의 속도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주말마다 모여 서너 시간 동안 축구를 즐기는 지인이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다행히 지금도 여전히. 몇 해 전 경기 중에 쓰러졌답니다. 급성 심근경색.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골든타임을 잃지 않았답니다.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아 생명을 지켰답니다. 그런 이 분이 같이 근무할 때 별명이 '송종일'이었습니다. 추측이지만 아마 유명했던 국가대표 선수의 이름을 빌려 누군가가 만든 것 같습니다. 송은 성씨지만, 왜 종일이냐면 점심 식사 시간 50분을 정말 식사에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 세 번 먹는 게 아니라, 한번 받은 식판을 한 입에 서른 번 이상씩 씹기 때문에. 학급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송종일을 찾으러 옵니다. 식당에서 그분 앞자리, 옆자리에 앉았을 때마다 듣는 인사말입니다. '나는 밥을 늦게, 천천히 먹으니까 급하면 먼저들 일어나셔'.


지난주. 작년에 전근을 간 학교에서 올해, 우리 반 34명을 졸업시켰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진학 부장 덕에 오랜만에 '졸업식은 자장면이지'하는 분위기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학교에서 삼삼오오 걸어 내려가다 보니, 예약한 세 테이블 중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네요. 오는 대로 시켰습니다. 모두 자장면 곱빼기로. 양이 엄청나더군요. 그런데 먹는 동안 오른쪽에 앉은 선생님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자장면을 먹는, 아니 들이마시는 속도가 엄청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말 한마디 없이 고개를 자장면 그릇에 푹 숙인 채 내 그릇 속을 자꾸 힐끔거렸기 때문이지요. 마치, 꼬맹이들이 누가 누가 먼저, 많이 먹나 경쟁하듯이. 물론 그 선생님은 채 5분도 되기 전에, 마지막 한 테이블에 팀원들이 나타나기도 전에 그 많은 자장면을 빈 그릇으로 만들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남매들 어릴 적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여행, 특히 가족 여행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하기로 하고. 많은 경우 지인들 식구들과 함께. 총 열여섯. 방콕, 랑카위, 홍콩, 타이베이, 군산, 여수, 양양, 강릉, 속초, 대부도, 영월, 진천, 지리산, 제주.... 다들 그렇듯, 새벽에 아이들을 깨우고 짐을 챙겨서, 늦은 저녁까지 그득, 그득하게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업무를 처리하듯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약속은 단 하나. '전원 조식 쟁취'에 대한 다짐, 또 다짐이었지요. 아이들은 눈을 감고 먹고, 못 내려온 아이의 부모는 웃으면서 인상 쓰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여덟 중 가장 형, 누나인 우리 남매들 조차 함께 했던 나라(도시)와 먹은 것, 탄 것, 본 것, 들은 것이 모두 뒤섞여 새로운 여행지를 창조하고 있으니 어린 동생들은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당연히 네 식구, 열여섯이 몰려다니다 보면, 보는 것, 체험하는 것, 먹는 것에 대한 선호가 조금씩은 다 다릅니다. 그래서 낯선 곳이지만 각자의 정보력으로 흩어져서 원하는 것을 충족하고 다시 모이는 것도 꽤 스릴 넘치고 재미있었습니다. 어른들의 기억이 조금씩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동을 하다 보면, 항상 앞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아빠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아빠에게 일행이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또 항상 맨 뒤에서 일행을 챙기는 엄가가 있습니다. 누가, 어느 골목에서 어땠는지를 기억해 줍니다. 그리고 언제나 피곤한 표정으로 도착지마다 앉을 곳을 찾는 엄마도, 움직일 때마다 아무 말 없는 무표정 아빠도.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영공, 영해가 엄청난 속도감을 지닌 영역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생존을 위한 태생적 운명, 뭐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아이들을 바라보면, 짠한 마음이 먼저 드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영역에 속한 국민들의 인생 자체가 속도감 있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지요. 항상 국가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고래 싸움에 내 등 안 터지는 지정학적 전략, 개인적인 처세술이 강력하게 요구되는 것이지요. 그 시대적인 요구에 맞춰 내가 몸담고 있는 어떤 조직의 연혁이 만들어지고, 우리 가족이 익어가고 개인의 역사가 구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도감은 당연히,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내 몸이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의 문제가 그 속도감의 차이에 기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먹고사는 문제만큼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시점이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재', '꼰대', '라떼는 말이야' 등의 표현이 유머러스한 단호함의 코드로 공론화되는 것이 지표 중 하나입니다. 나쁘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지요. 옳지 않은 것이고 함께 고치자는 문제 제기 가능성의 성장입니다. 제도화입니다. 그 가능성이 여기저기에서 더 커지고 있다는, 그게 다행인 것이지요. 정책과 제도, 직장 문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그렇게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개인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변해야 하는 것, 아마 대한민국이 진짜 나라다운 나라가 되려면.


'선생님, 저런 애는 좀 맞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학생이 아직도 가끔 있습니다. 공부하느라, 생기부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 나보고 더 '무섭게'하라고 조언(?)하는 학생은 더 많습니다. 두 학생들 모두 훌륭한 학생들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공론화하고 해결을 하는 그런 과정에 대한 연습이 부족해서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한방에 물리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불안증입니다. 서넛이 모인,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민주적 절차에 대한 경험치의 부족입니다. 시킨 대로 하고, 내 생각을 없애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는 경험치의 부족입니다. 반복되면 그 꼰대, 아재가 본인이 된다는, 그 세상에서 다시 갑질이 살아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의 연습이 적은 겁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또 다시 돈 때문이라는 핑계로 불이 잘 붙는 마감재만 쓰게 될거니까요.   


나부터라도 우리 동네 지인들끼리의 사이에서라도 나의 속도감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연습이 어릴 때부터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학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요. 지금의 내 나이가 내 인생에서 제일 어린 나이이니까요.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생각이 됩니다. 이미 오십이 넘었어도, 이제 열여덟이어도. 부모여도 아니어도. 가르치는 이어도 아니어도. 어른이 먼저 자신의 속도감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도감을 나이 어린, 경력 적은 이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이렇게 하면 강요겠구나 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살아온 짧은 인생을 돌아오면, 억울한 면도 있지요. 하지만 시대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듯합니다. 라떼가 지혜로운 조언이 되고 꼰대가 범접하기 어려운 경험치 - 어느 드라마의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어린이가 사라지면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고, 어른이 사라지면 노하우가 사라는 것이라고 - 가 될 수 있는 과제입니다.


산책을 할 때는 걷기 운동을 할 때보다 아내의 속도가 더딥니다. 지나가는 이들과 인사를 하고, 전화로 지인과 통화를 하고, 낙엽을 밟고, 사진을 찍습니다. 처음에는, 찍어 주고 표현에 반응을 하면서도 나의 몸은 이미 반쯤 가야할 길로 돌아서 있었습니다. 산책을, 걷기를 퇴근후에 해야 하는 또 다른 임무 중 하나로 여기는 몸의 반응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녀의 차이, 아내와 남편의 차이가 아니더군요. 내가 나의 속도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속도에 취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천천히 깨닫게 됩니다.  


나의 속도감만 스스로 인지하면 상대의 속도감은 자연스럽게 존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속도로 강요하지 말아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스스로가 자신의 속도감을 인지하는 겁니다. 그래야 다른 이의 속도에 휘둘리거나, 그 속도가 마치 자신의 속도인 것처럼 살아내는 순간, 자신이 다 타고 번아웃에 빠지는 상황을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 하는 휘게도 갭이어도 모두 서로에 대한 속도감을 존중하는 문화이니까요.  맥주보다 더 좋아하는 커피마저도 이렇게 맛도 다 다른데. 우리도 집에서 부터 동네에서 부터 쉬게, 쉬게(ㅋ 죄송합니다 ㅜㅜ)


아무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속도를 탓하지는 않는 것처럼. 아무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네 다리를 고정하고 버티고 있는 사마귀를 탓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강풍속에서도 여유로운 갈매기의 날개짓 방식을 나무라지 않는 것처럼. 다른 이들의 속도를 탓하기 전에 나의 속도감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꾸준하게 살펴보는 시간. 그 시간이 내 인생을 좀 더 신나게 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 새벽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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