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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17. 2023

여행의 본질

나의 Topophilia를 찾아서... 사진: Unsplash의LOGAN

여행, 내뱉기만 해도 참 설레는 단어다. 좋다. 10대를 지나면서 몇 번의 해수욕, 찜통 같았던 가냘픈 텐트 속, 소나무 숲, 모래, 짭조름한 바람이 기억난다. 내 몸이 기억하는 여행은 휴가였다. 아버지가 쉬시는 날, 차가 없었던 우리 집은 식구들 하나씩 가방을 나눠 들고 메고 기차를 탔다. 그렇게 타고 가던 느릿한 기차는 높은 산에서 멈춰 섰다. 그러면 기차 속에 갇혀 있었던 듯한 이들이 모두 우르르 플랫폼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재바르게 계단을, 비탈길을 오르고 내리면서 걸었다. 그리고 다시 산 아래에 기다리고 있는, 다른 기차로 옮겨 탔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다시 터덜거리면서 달리면 바다였다. 


남매들이 어릴 적 말레이시아, 태국, 태만, 홍콩을 며칠씩 다녔다. 아내와 나는 각자 금강산, 에스토니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오래전에 다녀왔다. 출장이었지만 비는 시간에는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내가 기억하는 여행은 이렇다. 10대의 추억처럼 보호자의 휴가였다. 휴가는 그 본질이 일상의 '멈춤'이다. 먹고살기 힘들었을 때, '멈춤'을 자주, 아니 한 번도 제대로 못 가졌던 부모 세대를 통해서. '멈춤'은 출근 안 하는 것, 일을 쉬는 것. 벌이를 일단 멈추고 소비하는 것, 그것이 여행이었다. 그 모습은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휴가를 꿈꾼다. '멈춤'을 상상한다. 그 상상의 힘으로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을 버틴다. 오늘도 나의 일상과 여행, 멈춤은 그렇게 여전히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 격하게 공감한다. 여행은 '내적인 대화'를 스스로 이끌어 내어 나를 성장시키는 모든 활동이다. 내적인 대화야말로 자아를 발견하고 내 삶을 디자인하는 밑거름이니까. 그 결과로 누구나 자신만의 상징에 주관적인 동기를 부여하고 의미로 해석하니까. 하지만 이 기술에는 근본적이고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장소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장소를 언제나 찾아다닐 수 없다. 나의 불확실한 일생을 가득 채우는 건 확실하게 익숙한 일상,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익숙한 일상의 멈춤이 아니라 그 연속되는 일상 속에서 내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일상 여행 기술이 요구되는 상황이 짙어지고 있다. 나의 삶에 윤활유가 되는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기술. 그 기술을 찾아 실천하는 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쉼을 마음껏 누리는 기술, 그 기술의 터득이 일상 여행의 본질이다.  그 본질에 대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고민과 실천이 이제, 우리에게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자녀 세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정신적 유산이 될 수 있다. 



여행의 본질은 '떠남'이다

여행은 자연환경과 인문 환경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활동의 총합이다. 그런 활동은 인류의 역사에서 늘 존재했다. 기원전의 가스트로노미아gastronomia, 17세기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 현재의 갭 이어gap year, 어디에서 얼마동안 살아보기 그리고 경산에서 대구까지 출퇴근하기. 이렇게 물리적인 공간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당연히 교통수단의 발달이다. 공간을 이동하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면서 인간의 다양한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이동에 필요한 시간 거리가 줄어들었다. 그 덕에 여행의 일정, 경로, 방식이 다양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수가 누리는 혜택에서 인간의 보편화된 활동이 된 것은 남녀노소 누구나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참 많이 떠난다. 캠핑을 가고, 기차를 타고, 비행기로 망망대해 위를 날아다닌다. 하지만 그렇게 다닌 게 언제였는지, 어디서 어디로 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특히, 내가 그곳에 마음을 두지 않았더라면. 동반했던 이들이 어리거나 대화가 서로 없었더라면. 먹고 자고 이동하는데 시간을 대부분 허비했더라면. 그곳이 어디이고, 그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그를 통해 무엇이 나를 달라지게 했는지 도통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 그저 좋았었다 정도다. 막연하게나마. 알랭드 보통의 제안처럼, 여행의 본질은 '대화'이다. 같이 움직이는 이들과의 대화. 먹고 자는 것과 관련한 선택과정에 필요한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나와 상대방의 마음을 이어 줄 수 있는 대화. 그 대화 끝이 내적 대화로 이어지면 너무나 훌륭한 여행 선물을 바리바리 챙긴 것이다. 


대화가 있는 여행을 떠올릴 때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을 벗어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벗어난다? 그렇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루틴을 새로운 일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정 역시 금방 다시 익숙한 루틴이 된다. 반복이다. 세계적인 여행의 추세이기도 한 '어디에서 얼마동안 살아보기'가 그렇다. 나의 일상을 벗어나 다른 이의 일상옆에서 자신과 주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여전히 일상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삶에 필요한 체력과 지혜로운 답을 얻으려는 탐색 활동이다. 하지만 그런 탐색 활동은 숙명처럼 우리 곁에 늘 존재한다. 그렇게 때문에 휴가, 여가, 놀이, 멈춤이라는 좁은 의미의 여행이 아니라 발을 내딛는 모든 순간의 연속의 총합, 그것이 여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떠남이 있는 모든 활동이 여행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아무튼 출근이다. 어느 드라마 장면처럼 프리랜서라도 거실에서 자기 방으로 출근이다. 이렇게 저렇게 발버둥 치지만, 나는 일상 속에 머무르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신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 나는 언제나 발을 내딛는다. 출근하고, 퇴근한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비슷한 이들을 접하면서 정확하게 파악한 듯한 업무를, 일을, 공부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 자체가 나의 실제적, 육체적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일상 속의 모든 움직임의 본질은 '떠남'이다. 잘 다녀오겠다는 다짐을 나에게 지인에게 가족에게 하는 떠남이다. 짧게 떠나건 길게 떠나건 떠남 그 자체가 여행인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내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그곳이 어떤 곳이건 상관없다. 내일을 위해 침대로 떠나고, 침대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엘리베이터로, 집에서 우리 동네로, 우리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서울에서 수원으로 대구에서 경산으로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잠에서 깸으로. 월요일, 화요일, 금요일, 일요일 몸을 뉘었던 곳을 나오는 순간, 나의 여행은 언제나 다시 시작된다.  




여행의 본질은 '걷기'이다

위에서 말한 교통수단, 즉 탈것들의 발달은 공간 간의 시간 거리를 단축시킨다는 의미일 뿐이다. 결국은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한 뒤, 그 공간 내에서의 움직임 자체가 더 큰 의미의 여행이다. 탈것들의 역할은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것. 물론 탈것 자체에서 나를, 누군가를 만나고 그것이 내 인생의 강력한 영양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 먹고, 푹 자면서 움직이는 과정에서 만나는 탈것들의 근본적인 역할은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것이다. 


탈것들을 통해 더 작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조금은 빠르게, 편하게 이동을 한다. 우리는 더 작은 그 공간을 흔히 지역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역은 지리적 특성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표상의 공간 범위를 말한다. 어렵다. 좀 더 흔한 표현으로 다시 한번. 지역은 작은 장소들도 나뉠 수 있다. 포인트는 그 장소가 가지는 지리적 특성을 찾아보는 것. 그게 떠남의 전부이다. 뭐, 우리가 잘못 배운, 지금도 잘 못 가르치고 있는 암기 과목, 지리 공부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음식을 왜 먹는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풍부하고 부족한 지, 이 골목은, 여기 상점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겼는지, 저런 물건을 파는지. 왜 저런 옷을 입고, 저런 표현을 쓰는지. 



그렇다고 나는 돌다리를 수선하고 있는 저 사람들 옆을 지나가기를 꺼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시는 없는지, 또 나의 반성의 재료는 없는지 알아볼 것이다. 숲과 돌 등 자연의 광대한 모습만을 보려는 것도 일종의 편협함이다. 위대한 지혜는 사람들의 일상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로의 일기'



일정 기간 비용을 모은다. 먼저 다녀온 이들의 정보를 얻는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다. 경로를 확정한다. 멈춘다. 떠난다. 잔다. 먹는다. 본다. 체험한다. 이동한다. 멈춘다. 잔다. 먹는다. 본다. 체험 대신 쉰다.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한다. 다시, 이동한다. 잔다. 먹는다. 본다. 체험한다. 이동한다. 다시 잔다. 다시 먹는다. 다시 본다. 또 체험한다. 구경한다. 다시 이동한다. 돌아온다. 그 이후 언젠가의 다른 멈춤을 다시 나의 일상에서, 갈구하기 시작한다.....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그 갈증을 채워야 한다. 편협함을 벗어나 일상 속에서 치열하게 나의 삶에 필요한 지혜를 찾아내야 한다. 내가 늘 다니는 골목, 도로, 자주 보는 경관, 익숙한 이들과 관련한 활동 속에서.  


여기에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운동. 거창한 운동이 아니라 자기 몸을 이완시키고, 작은 근육들을 단련시킬 수 있는 모든 움직이면 된다. 제자리에 서서, 잠깐 앉아 있을 때, 침대에서 내려오기 전에. 자신에게 익숙한 작은 동작 몇 개들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에서 말한 지리적 특성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음식을 먹고, 잠을 잔다. 적당하게 잘 먹고, 푹 자야 잘 본다. 그곳이 어디건. 그렇기에 음식도 잠도 모두 여행의 중요한 활동 요소인 것은 당연하다. 잠, 음식, 운동이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그 필수 요소들을 바탕으로 내가 있는 공간(지역-장소)과 시각을 바르게 느낄 수 있는 방법. 그게 바로 걷기다.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 그게 여행에서 얻는 지혜의 본질이다. 그래서 걸어야 한다. 걷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다. 잘 걸어야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만드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세상은 내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에게 다른 의미가 되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나를 바꿀 수 있는 활동이다. 



여행의 본질은 '탐색'이다

우리는 늘 새로운 일상을 꿈꾼다.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 속에서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아이러니한 상황을 선택한다. 언제나 놀거리를 찾고 마음껏 뛰어노는 공간을 꿈꾼다. 그러나 조금만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보라. 그렇게 늘 새로움을 꿈꾸듯 살지만, 익숙함에서 안정감을 갖는다. 안전을 느낀다. 늘 가던 길로 걷고, 어제 앉았던 자리가 더 편안하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늘 먹던 자리에 눈길이 먼저 가는 나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일팔 청춘 따님이 집에서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집에 있는데 집 가고 싶다'라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 그런 날이, 때가 가끔 찾아온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와의 정서적 유대가 풍부한 곳, 안전이 확인된 곳, 예측이 가능한 곳에 대한 안락함 때문이다. 물론 집이 그런 공간이 되는 것이 참 많이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순간순간 놓치고 살지만 말이다. 


오늘도 잠시 멈추고 떠나가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듣고, 보면서 나도 다짐한다.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을 나도 언젠가는 멈추리라고. 이런 현상 자체만 놓고 보면 고무적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옅은 여행의 의미가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짙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보고, 먹고, 만나는 행위보다는 '살아보는' 행위에 더 초점을 맞추는 활동이라는 의미이다. 그 속에 여행의 본질이 있다. 벗어나서 잊음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감을 주거나 삶의 전환점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 특히, 어린 자녀들이 생텍쥐베리나 롤링과 같은 사람들이 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어른들의 애씀. 그리고 어쩌다 된 어른이인 나에게 여가로서 나의 삶의 가치에 대한 보상. 그 보상을 통해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게 여행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살아보는' 행위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속에서 한달살이, 일년살이, 살아보기 열풍이 서서히 시작되어 왔다. 나는 실제 그렇게 움직여 보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바람직하고 좋은 열풍이라고 생각한다. 그 열풍은 한국에서 태어나 10대, 20대를 살아냈던 이들이라면 기억할 여행 아닌 관광. 자신의 일상을 멈추고, 다른 이의 일상옆에서 먹고, 놀고, 눈으로 구경하는 관광. 그렇게 일과 여행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데 익숙했던 관광객을 벗어나기 시작한 징조이기 때문이다. 소비적인 관광객에서 생산적인 여행자로 나라 전체가 그렇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자녀들이, 다음 세대들이 10대 때, 여행의 본질을 알아간다는 건 그 10대의 긴 인생에서 치명적 이리만큼 훌륭하고, 멋진 경험이다. 그렇게 '살아보기'는 역설적으로 많은 이들이 일상 여행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살아본다는 건,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 일상에서 자신의 삶을 탐색하고 정체성을 강하게 만드는 시간과 공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토포필리아를 찾아라

인간은 누구나 장소감placeness을 느끼는 곳에서 안정과 안전, 안락함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장소를 찾으려고 평생을 여행하는 것이다. 이미 찾았다면, 그곳에서 되도록 오래 머무르기 위한 묘안을 만들고 실천하는 게 일상이다. 그것이 바로 여행을 통해 얻는 궁극적인 것, ‘토포필리아’(topophilia)이다. '사랑philia이 녹아 있는 장소topos'이다. 곧 사람이 장소와 맺는 정서적 유대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나, 우리, 사랑이 정서적으로 유대감을 가진 장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렇게 느끼지 못하거나 덜 느끼기 때문일 뿐. 나의 토포필리아는 내 컴퓨터 안 폴더 속에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나만의 토포필리아를 두드린다. 사랑이 넘치는, 정서적 유대감이 깊은 나만의 공간 찾기, 갖기, 살기. 자기만의 토포필리아Topophilia는 살아야 찾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이게 여행의 본질이다. 



나의 일상을 잠깐 벗어나 타인의 일상 곁으로,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게 여행의 시작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여행과 타인의 일상이 겹쳐 펼쳐지는 것, 그게 여행의 끝이다. 나의 일상에 겹쳐진 여행자들을 만날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결국 여행은 공간, 장소에 버무려진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움직임이다. 여행의 본질은 낯설고 익숙함의 구분이 아니다. 익숙함은 그저 낯익은 것일 뿐, 그 본질을 이해하고 본성대로 움직이고 생각한다는 것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 생의 첫 여행은 가족과 함께 한 공간과 시간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가족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장소, 활동, 시간. 같이 걷고, 먹고, 일상에 얹혀진 비트를 공유하고, 생각을 나눈다. 위로를 주고받고, 서로의 안정과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정서적 유대감을 갖는다. 갈등을 통해 조정의 시간을 갖는다. 그 경험치의 누적이 여행의 결과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라는 별의 모든 이들은 가족 안에서, 가족을 떠나 이미 여행 중이다. 태어난 자체가 운명적인 여행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운명적인 여행을 위해 떠나고, 걷고, 탐색하며 산다. 먹고사는 과정에서 언제나 나만의 토포필리아를 찾아서. [지금, 여기, 언제나의 오늘]에 '잘 다녀오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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