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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Feb 27. 2023

항문 있으시지요?

사진: Unsplash의Avinash Kumar

가끔 잊고 있었던 추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상황이 있다. 어떤 공간에 머물 때 혹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비슷한 장소에 있을 때 그리고 불현듯.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런저런 결정을 하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그 좁디좁은 틈 사이에서. 그 좁은 틈 사이에서 아내가 예약해 준 낯선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갔다. 숱은 많은데 힘이 없는 모발 모발에 힘을 줘야 한다, 는 일팔청춘 따님과 아내의 성화 덕분에. 서너 달마다 반복되는 일정이다. 그런데 항상 그랬다. 아내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단순하게 어떤 메뉴를 정할 때라도. 그래서 난 먹을 때도 어딘가를 예약을 할 때도 아내의 정신적 작용에 늘 의지한다. 아, 물론 아내 없이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처음 간 미용실. 며칠 전 한 문자를 받았다. '그동안 저의 ***을 애용해 주신 고객님들께 마지막 인사드립니다. 일보다는 아이와의 시간을 위해 폐업을 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저도 아이와 열심히 살아보려고 합니다'. 역시 아내의 정신적 작용을 빌어 다녔던 미용실 폐업 문자였다. 그리고 그 대각선 반대편 건물 뒤쪽에 아담하고 예쁜 미용실에 눈에 들어왔다, 고 아내가 차 안에서 잠깐 세워달라고 했던 것이 있었다. 거기였다. 약속된 시간에 가 보니 미용 의자가 두 개만 있는 새하야얗고 정갈한 정원같이 꾸며놓은 곳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사장님이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흡사 빨간머리 앤이 나이 들었나 싶었다. 연구원에게 어울림직한 안경을 낀 채. 백퍼 예약제라 나에게 주어진 두서너 시간 동안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 왠지 모르게 크게 환영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만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그런 곳은 처음이었다. 


얼굴보다는 눈빛이 먼저 나에게 와닿았다. 나도 인사를 하고 텅 비어있는 두 개의 의자 중 왼쪽에 앉았다. 간단하게 취향을 말씀드리는 동안, 사장님의 눈빛이 내가 들어올 때보다는 훨씬 더 많이 웃고 있었다. 그렇다. 뭐라고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처음 보지만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편안해지는 사람도 있다. 사장님은 후자였다. 전혀 말이 없으시고, 묵묵히 자신의 절차대로 나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지셨다. 그러다  이야기 중에 '60이 되고 나서 보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아 60대시구나' 싶었다. 그러나 외모도 표정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중간 나를 염두에 두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데, 그 생각과 표정에 확신에 찬 좋은 선배,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사장님의 주된 관심사는 건강이었다. '몸나이'에 대한 자기 고민과 실천을 이야기하는 동안 인생이 건강해야 재미있다, 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을 드리니 하나 둘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마치 대신해주는 듯 자신의 삶과 생각,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시기 시작했다. 물론 과하지 않게. 나를 계속 염두에 두는 말투로. 그 속에서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한국이 아주 많이 나라다운 나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와 자식의 정서적 고리를 일찍 분리해 내려는 자신 또래의 부모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것에서 느끼고 있다고. 자신의 세대는 어찌 보면 부모 세대로부터 가스라이팅을 통해 그렇게 길들여져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도 진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이 각자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는 가정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몸나이'에 대한 관심을 각자 많이 가져야 한다고. 그러면서 갑자기 '항문 있으시지요?'라고 질문을 해서 '네? 아! 네!'라고 대답하고는 서로 웃음을 지었다. 잘 때도 평소에도 입으로가 아닌 코로 호흡을 해야 건강해진다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강조를 하는 과정에서의 질문이었다. '그렇지. 나? 항문이 있지'라고 속으로 혼자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 평소에 두 가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가 호흡법이고 하나가 소금이라고. 소금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아서 먹어야 건강해진다. 코로 호흡을 하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고 항문을 의식하면서 들숨과 날숨을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나 혼자의 공간에서 나의 의식의 흐름 속에 누군가에 등장을 하게 되면 사람은 일단 경계심이 발동하게 된다. 자기 안전 방어에 대한 본능이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본다. 상황 판단을 한다. 그리고 상대를 파악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결론 내린 대로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 편견이고 선입견이다. 모두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의견이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된다. 합리적인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의심 가득한 이기주의자가 된다. 


내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겁이 많고 의심 많고 잘 섞이지 않는. 물론 조금 지나고 나면 편안해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았다, 고는 하지만. 본능적이었다. 특정 공간에서 일정 시간을 함께 해야만 하는 미용실과 같은 공간에서는 더더욱. 자신을 드러낼 필요도 없고, 알릴 필요는 더더욱 없고. 그저 존재하지 않은 듯 있다가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옹졸함에 가까운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완벽한 사람, 틀리지 않는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철옹성 같은 성벽을 겹겹이 쌓여 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성벽에 흠집이라도 나게 되면 그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혈안이 되는 그런 사람. 


처음 보는 이와 '항문'을 이야기하고, 십 년은 족히 차이나는 이성과의 수다에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보면. '나도 참 나이 잘 들어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시간이 빨리 가고 마음이 편안한 또 하나의 장소를 동네에서 발견한 것이 기쁜 날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한 머리가 너무 마음에 드는 건 그 마음이 와닿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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