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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06. 2023

바통 터치

사진: Unsplash의Janosch Lino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548에서 이어집니다)


아드님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여행, 운전, 아들을 너무나 좋아하던 나. 이 세 조합을 연결하려고 한참을 공을 들였다. 부자만의 여행을 가자면서 꼬셨다. 아내를 쉬게 하고 싶은 생각도 컸다는 건 안 비밀이다. 전적으로 아버지 - 당시 아들은 태권도장의 영향으로 자그마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버지 아버지하고 불렀다 - 의 꾀임에 넘어 간 아들덕에 그렇게 1박 2일, 아빠가 되고 나서 인생 최초의 부자 여행을 승용차로 출발했다. 8월 초 어느 날 오전 9시가 조금 넘어서. 최종 목적지는 남해 다랭이 마을. 조수석에 아들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달렸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맛난 것도 사주고, 장난감도 사주면서. 그런데 대구를 지나면서 휴게소에 쉴 때도 아들은 먹지를 않았다. 내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에어컨을 세게 틀었는데도 아들의 이마에는 좁쌀 같은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러다 목적지를 1시간 정도 남겨 놓고, 결국 탈이 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 '아버지, 나 졸려요'를 연발하더니 급기야 앉은 채로 먹은 걸 다 게워내었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은 새파랗고.


그렇게 운전을 한 지 반나절 만에 낯선 동네 병원 응급실에 아들을 눕혔다. 단순하게 체해서 그렇다는 의사의 말에 안심을 했지만 링거를 맞으면서 아들은 진짜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옆에서 세 시간 넘게 손만 잡고 앉아 있었다. 자는 동안 아들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입술로 실룩거렸다.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했다. 내 손을 꽉 잡았다 놨다 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난 아들은 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입술은 다시 통통한 분홍빛을 띠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자고 일어난 아들의 첫마디는 '엄마'가 아니었다. '아버지, 우리 가야지요. 여행'이었다. 나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조차 감추느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 생각만 한, 멋진 아빠가 우선인 못된 아버지라는 걸 느꼈기 때문에. 아들이 출발할 때 아침 먹고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기억해 낸 자격미달의 보호자였다. 


'괜찮아. 안 가도 돼. 뭐 좀 먹자. 뭐 먹고 싶어, 응? 뭐 먹을까?'


'.............'


'괜찮아. 뭐 좀 먹자? 응?  아님, 다른 거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00아?'


'.............'


'엄마한테 갈까? 집에 갈까?'


'.......?  그럼, 우리 여행은요?'


'응? 여행? 그건 나중에 또 오면 되지'


'그럼.................................... 엄마한테............. 가요'


나는 쉬지도 않고 4시간을 거꾸로 달려 집에 도착했다. 달리는 내내 아들은 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운전을 하는 동안 울컥했던 그 마음은 지금도 가슴 한가운데가 저릿하게 기억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와락 엄마한테 안긴 아들. 식탁에서 밥 한 공기 반을 뚝딱 해치우고,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동생과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참, 다행이었다. 더 대단한 건 나에게 그 어떤 타박도 하지 않은 아내. 그 이후로 나를 아버지, 아버지하며 부르던 우리 아들은 내게 아드님이 되었다. 미안한 아드님이. 


그 일 이후로 나는 의식적으로 아드님과 대화를 할 때는 '지분'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결정의 순간마다. 처음에는 책임 전가, 회피의 마음도 없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보다 아드님 스스로가 싫고, 좋고의 결정과 합리적인 이유를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자주 지켜본 아내는 지금처럼 나와 한 팀이 된 지 오래다. 아드님, 따님 앞에서 우리 둘은 다른 의견을 절대 제시하지 않는다. 설령 대화 중에 둘의 의견이 달라지더라도. 그렇게 우리는 지금도 연습 중이다. 이 연습은 따님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앞으로 2년은 더 이어가기로 아내와 무언의 약속을 했다.


자기 지분을 높여서 자그마한 것부터 결정해 버릇하는 그 연습은 어른이 미성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이다.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최면에 걸려 살아온 부모 세대와 우리, 우리와 자식 세대의 출렁다리 역할을 하는 우리 세대에게는 더더욱. 자식 세대가 살아갈 미래 세상에서는 기본적인 삶의 역량이다. 의사결정력. 정보 처리 능력. 그렇게 미성년의 선택에 대한 지분을 높여가는 연습의 시작점은 가정일 수밖에 없다. 부모가 주도할 수밖에 없다. 정서적 유대와는 별개의 문제로. 일부러라도 자녀들의 선택 지분을 더 높여야 했다. 책임전가여도 좋고 먹고살기 바쁜 핑계의 회피여도 좋다. 하지만 먼저 생각하고, 혼자 결정해서 명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싶다.


몇주 전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듣는 이름으로 남겨진 메모와 같은 번호였다. 의절하다시피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살던 큰고모. 그분의 막내 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무슨무슨 연구소 연구원이라는 메모를 남긴 이었다. 나와는 고종사촌지간이지만 한번도 본적은 없다. 아니, 아드님이 차에서 식은 땀을 흘리던 그 나이때쯤 봤을텐데 기억이 없다. 지금은 본인이 엄마를 모시고 산단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기전 외할머니(나에겐 할머니)의 묘를 개장해서 외할아버지(나에겐 할아버지)묘 근처에 뿌려 드리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단다. 그러면서 개장 절차를 진행중인데, 외삼촌(우리 아버지)께서 몇십년 동안 묘를 관리해 오셨는데, 미리 전화를 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끝에 나에게 전화를 했단다. 사무실로. 아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투였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와 함께(동생은 교회를 다니기때문에 잘 따라가지 않았다. 게다가 움직일때가 대부분 주말이었던 이유도 있고) 벌초를 다녔다. 6남매중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맞다. 고된 일이었다. 예초기를 짊어지다 시피 해서 산비탈을 허리 숙이고 기어올라가야 하는, '일'이었다. 어떤해에는 산아래까지 도착했지만, 여름 홍수때 그나마 남아 있던 벌목로마져 잘려나가 그 앞에서 되돌아온 적도 있다. 하지만 그때도 아드님은 한번도 데려가지 않았다. 아직 어려서 위험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나와 아내의 속마음은 달랐다. 이런 행위들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 그렇게 일곱살 아드님이 스물 하나가 되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짊어진 짐. 부모 세대들이 이 세상에 다녀 간 흔적들을 모두 감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결코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하는 세레모니는 아니었기에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왔다.   


묘지관리법이 바뀌어서 이제는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한 경우에는 기한이 60년이란다. 60년 이전에 어차피 봉분을 없애고, 관할 행정기관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나와 스무살 차이나는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 요즘에도 방영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딩엄빠'. 오십여년전 우리 부모님이었다. 아니, 초졸엄빠셨다. 하지만 그 젊음속에는 무의식적으로 가스라이팅 당한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당신들은 절대 화장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런데 그 이유가 '어찌 사람을 두번 죽여. 얼마나 뜨겁겠어'라면서, 내 어릴적 부터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말씀을 하셨다. 손자들이 크면서, 제사를 하나씩 스스로 정리하시면서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지만. 여전하게 그렇게 초졸엄빠의 의식속에 묶여 있으시다. '자기지분'이란 개념은 애초에 당신들 세대에는 없었던 거다. 원래 그렇게 해야 했었고, 정해진 대로 살아냈어야 했었기 때문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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