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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23. 2023

구멍뚫린 마음

[나] 시리즈25...사진: Unsplash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746에서 이어집니다)


릴라가 바로 이어 외쳤다. ***이 누구니. 엉? 누굴까 하고. 그건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그냥 비아냥 거리는 억양이었다.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분명. 그게 나라는 걸 알았다. 대답을 하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을 했다. 갑자기 엄마, 아버지가 한꺼번에 보고 싶어졌다. 애들 앞에서 아, 이게 뭐지 하면서 화도 솟구쳐 올라왔다. 하지만 그 화는 아직 분노는 아니었던 것 같다. 네. 하면서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앞뒤 좌우에서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참 많이 부담스러웠다. 남고라 다행이었다는 생각은 대학생이 되고 한참을 지난 후 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냥 싫었다. 아이들이 답답할 때, 말하기 싫을 때 툭 하고 내뱉은 대답, 그냥요 처럼. 수없이 많은 게 다 원인인데 딱 하나를 꼽으라고 강요받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끔 던지는 그냥요였다.


아,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보통 나와,라고 한다. 그런데 릴라는 역시 유난했다. 직접 그 달랑거리는 시험지를 꼬맹이들 비눗방울 놀이 하듯 흔들흔들거리면서 나에게로 직접 걸어왔다. 그때 아마 나 밖에서 나를 봤더라면 비바람에 몰아치는 버드나무이지 않았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이 흔들려서 어지러웠다. 누가 내 입을 틀어막은 듯 답답했다. 내려다본 교실 바닥은 한없이 깊게 빠져 내리고 있었다. 일부러 아주 천천히 런어웨이를 하듯이 질질 끌고 다가오는 슬리퍼 소리가 역겨웠다. 하지만 그 역겨움은 어디에도 뱉어낼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내 안으로 계속 그렇게 토악질이 흘러넘쳤다. 그 토악질로 내 몸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딱 그때였다.


릴라는 왼손가락으로 나의 이마와 머리 사이의 경계 부분을 정확하게 딱 집었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한 번에 몇십 가닥을. 나는 교실 가운데 통로에 그렇게 릴라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다시 그 말이 터져 나왔다. 너 뭐니. 이 시험지가 너꺼 맞니. 이 문제도, 이 문제도, 또 이 문제도 다 첫 경험이니. 왜 그랬니. 어떻게 우리 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니. 너 전교 꼴찌야. 수학 전교 꼴찌라고. 야, 너. 야구부지. 너 수학 몇 점 받았어. 8점? 엉. 그래. 너는 운동선수 제랑 점수가 같아. 같다고. 이 참에 운동이나 해라. 엉.


유난히 더 부어 보인 윗입술이 아랫입술에서 살짝살짝 만 떨어지면서 엉엉거렸다. 쇳소리 섞인 베이스음 같은 게 계속 흘러나왔다.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성악을 하면 딱 어울리겠다는 싶은 목소리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의 머리는 짧고 굵은 두꺼비 같은 손때문에 앞으로 당겨졌다 뒤로 밀어졌다 반복했다. 여전히 구멍 뚫린 시험지는 수백 번은 그렇게 반복했던 것 같다. 처음 몇백 번은 하는 대로 밀려가고 밀려났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힘을 주고 있었다. 당기면 밀리고 밀려고 하면 밀어내려고 하고. 릴라는 금세 나의 반대를 눈치 차렸다. 요거 봐라. 너 힘을 주네. 엉. 개기는 거구나. 너. 그런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공부를 해. 공부를. 


집에 가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았다. 짧은 드럼채 그 끝에 내 가슴이 구멍난 채 걸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아이들이 옆에 있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구멍 뚫린 시험지를 매달고 있는 짧은 드럼채가 나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사이로 쑤욱 들어오는 순간 오른팔을 위로 크게 휘둘렀다. 딱 한번. 크게 어깨를 돌리면서 스트레칭을 하듯이. 하지만 팔을 길게 제대로 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오십견에 어깨가 완전히 돌아가지 않아 적당히 회전시키듯이 어정쩡하게 그렇게 돌렸던 것 같다. 나도 그 움직임이 참 어색하다, 고 느끼는 순간 릴라의 거무스름한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쨍한 금색테 안경이 가리고 있던 커다란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흰자위가 검은 눈동자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다 덮어버릴 기세였다. (다음편에 계속....)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75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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