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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 Aug 27. 2021

7. 기러기 아빠는 절대 안하겠다던 남편

저는 어린 시절 외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외국'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외국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자주 남편에게 비추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남편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절대 기러기 아빠는 안 할 거야"


'절대'라는 말을 쓴 저주였을까요? 저는 결혼 초기부터 주말 부부 혹은 월 2회 부부로 살았습니다. 첫째를 임신하던 시기는 임신 호르몬의 영향인지 혼자인 것에 대한 우울감에 매일 같이 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임신, 출산 그리고 육아는 저에게 잘 맞았고, 첫째가 태어난 후로는 혼자 하는 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오히려 가끔 남편이 오면 제가 스스로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영향을 받게 되어 불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또한 남편이 다른 것보다는 공부와 일로 바쁜 상황이었으므로, 어느 순간부터는 '너의 목표를 응원한다, 그러니 나의 생활도 존중을 해줘'라는 마인드를 가진 좋은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남들과 같이 다정한 부부 사이가 부럽지 않았냐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 만의 방식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주재원 공고가 떴던 그 순간을 저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팀장님 자리에서 보고 자료를 리뷰하고 있던 중, 팀장님께서 순간 넘긴 협조전 페이지 리스트 중에 "미국 주재원 공고" 협조전을 보았습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것이 무엇이던, 팀장님께서 협조전을 내려주시지 않던 무조건 찾아서 써야겠다.' 그러나 다행히 팀장님 또 실장님까지 협조전을 저에게 공람해 주셨고, 적극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지 못하더라도 지원했다는 것에 만족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하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남편과 진지하게 얘기하지 않았고, 언제나 그렇듯 저희는 각자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합격소식을 들었고, 그제야 남편에게 얘기를 하니, 남편은 무척 기뻐해 주었지만, 본인이 바로 같이 가긴 어렵다는 얘기를 하였습니다.


"오빠는 기러기 아빠는 절대 안 한다면서?"

"이건 내가 얘기했던 기러기 아빠가 아니지."

* 기러기 아빠 : 자녀 교육을 위해서 배우자와 자녀를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하는 아버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솔직히 남편이 바로 같이 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는 남편의 삶의 로드맵이 있고, 저에게는 저의 삶의 로드맵이 있는데, 갑자기 저의 삶의 로드맵이 바꿨다고 바로 변경해 달라고 할 수는 없기에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맞추어가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해 저희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어디 가서 얘기를 할 때마다 "제가 주재원으로 나왔고 아직 남편은 한국에 있어요."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조금은 불편했습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누구보다 화목했고, 남편과 저는 어느 때보다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러다 다른 여성 주재원 분을 만났고 그분은 너무 당당하게 '혼자 와 있어요.'라는 말을 하시는 것을 보고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불편한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참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의 불편한 이유는 아마도 '아이들을 제가 데리고 왔기 때문.' 인 것 같습니다. 올바른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혼을 할 때도 양육권이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일 텐데, 미국행이 결정되고 남편에게 아이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상의를 하지 않고 당연하게 아이들과 함께 출국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한마디 불만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결혼과 출산 이후 아이들에 관한 것은 제가 거의 결정을 해왔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에 있어 에너지가 부족하여 남편과 상의 없이 빠르게 일을 처리해 왔다고 할 수 있고, 사실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제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신혼 때는 남편과 정말 많이 싸웠습니다. 남편은 모든 중요한 결정을 제가 혼자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고, 저는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내가 결정하는 게 빠르고 편하다는 이유를 들었고, 그런 불만을 가질 시간이 있다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약 8년이 지나고 나니 다툼은 줄었고, 저는 계속 제 기준으로 일처리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정말 많이 포기하고 나를 맞춰 주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가정이 행복할 수 있던 이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는 '혼자 하면 힘들지 않아요? 혼자 대단해요'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저는 차라리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한 스타일이라 그것이 더 좋습니다. 남편은 신혼 초 싸울 때마다 저에게 '독불장군'이라고 했는데 남편 말대로 '독불장군'이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남편을 한국에 두고 아이 둘과 미국으로 출국을 합니다.


이삿짐 가는 날이 어제 같네요.



* 표지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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