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반드시, 꼭 만나게 되는 거야"
어른과 아이의 기다림의 차이가 있다면
"기다려". 아이를 키우며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다. 하루에도 여러 번, 기다려야 하는 순간과 마주해서다. 삶의 기본인 세 끼를 챙기는 일의 시작도 기다림이다. 밥을 차리고 식탁에 올릴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비로소 밥술을 뜰 수 있다.
아이를 키울수록 기다림을 아는 건 점점 더 커간다는 것과 같은 말임을 느낀다. 다섯 살 첫째와 세 살 둘째의 기다림은 그 시간적 길이부터 다르다. 두 돌이 채 안 된 둘째가 원하는 걸 당장 얻으려 온몸으로 요구하는 것과 달리 약속이란 개념을 알아가는 첫째는 지금이 아닌, 다음을 기약하는 법을 안다. 매번 의젓하게 기다릴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다림의 이유는 분명히 아는 것 같달까.
하지만 아는 것과 그걸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남편이 5개월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다시 '육지'(제주섬 밖)로 가게 되자 첫째는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시시때때로 "아빠가 보고 싶다"며 울먹였다. 그동안 아빠와 함께한 시간이 많았기에 빈자리가 클 수밖에 없었다. 몇 밤만 자면 아빠가 올 거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기다리면 만나게 되는 거야." 아빠와 떨어져 있는 걸 행여나 이별로 받아들이지 않게 이 말을 자주 해줬다. 믿음이 커지면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겠지 싶었다. 이 말 역시 큰 효과는 없었지만 언제나처럼 시간이 약이 됐다. 일이 바쁘지 않으면 쉬는 날 어김없이 집에 돌아오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기다림은 곧 만남이라는 나름의 등식을 만들어 가는 듯하다.
사실 어른들에게도 기다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는 게 더 많아진 탓이다. 어른인 나는 안다. 간절히 기다려도 만날 수 없고, 안 되는 게 분명히 있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네 아이만큼은 천천히 알았으면 한다. 간절한 기다림이 없으면 포기가 쉽고, 그 순간이 덤덤해지면 설렘도 없기에. 그래서 이렇게 말하려 한다. "기다리면 반드시, 꼭 만나게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