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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Feb 28. 2022

조금만 내 얘기를 해볼까


성숙(成熟)


 세상은 요지경이다. 사회적으로 정의한 나이에 도달하면 성인이라고 하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성인이나 어른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세상은 성인과 어른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 둘 사이에 겹겹이 많은 경험들이 가리워져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해, 나는 성인이 되고부터 지금 해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맸다. 또래보다 일찍 하고싶은 것을 찾아서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그 결과가 실패로 돌아왔을 때의 허탈함. 그리고 차후에 원하던 것을 가졌을 때의 일시적 기쁨과 허무함은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내게 돌아왔다.

 내 유년시절은 동경이었다. 언제나 내 상황에서 가지기 어려운 것들만을 바라보면서 초라한 내 상황을 수습하기 바빴고, 내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은 믿지도 않는 신에게 맡기고 자기 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동경하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믿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객관화와 나의 환상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 저변에는 숱한 불안과 설렘이 한데 뒤엉켜있기 마련이었다. 자신과의 신뢰를 쌓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며 타인이 나를 어떻게 완벽히 신뢰하고 나의 앞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시기와 질투는 당연한 것이라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나의 선택에 반대부터 하는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불신과 불안을 덮을 유일한 방법은 자기반성이라는 생각이 들어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세상 일을 홀로 이겨내는 것이 버거워져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해답이 나올 것 같아 독서랄 것을 즐겼었다. 나는 거기서 인생에 예측불가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들의 대처 방법을 주로 배우곤 했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성숙'에 대한 갈망이 일어났던 것 같다.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평하거나 좌절하기보다, '이 일을 어떻게 극복해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성숙이라 여겼다. 사람들은 내게 강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어떤 일에 대한 슬픔을 감당할 그릇이 넓지 않다. 빨리 성숙해지면 그만큼 아픔도 덜할 것이라는 약한 생각에서 비롯된 욕심이었던 것이다. 지루한 일상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감정이 무척 동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아무리 무언가를 겪고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생각해도,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매번 조금씩 다른 형태로 덮쳐오기에 그 변화들에 허덕이는 시간은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내가 인식하는 성숙의 의미는, 나의 고집을 좀 꺾고 어제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유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슬픔의 역설로 수용할 수 있는 마음. 마치 그 위에 넘어져도 그러려니, 무디게 일어설 수 있는 몽돌처럼.

 나는 어른이고 싶다. 언제쯤이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며. 육체적으로 고생하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주 힘든 일을 많이 해왔는데, 결과적으로 나를 어제보다 나은 어른이 되게 하는 건 노동이 아닌, 그 알량한 예측불가한 일들이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반복될 수록 조금씩 성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경험을 통해 무언갈 배우고 성장할 수 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인 것 같다. 하고픈 대로 할 수만 있다면 그건 꿈만이 있는 세상이겠지. 원치 않는 일의 연속일지라도 그 끝엔 언제나 나를 위한 것이 있고, 행운과 불행의 널뛰기 속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지 않을까. 우리가 그토록 사랑을 찾아 헤메는 이유는, 지켜야 할 것을 만들어서 힘든 일도 기쁜 일도 버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왠지 인생의 명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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