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언제나처럼 다시 마음을 다잡고
팀에 휴직하는 분이 계셔 그분의 일 일부를 나도 맡게 되었다. 한참 인수인계와 다음 서비스 배포 준비로 정신이 없던 어느 날, 팀장님이 빨리 해야 할 것 같은 과제가 있다고 나를 불렀다. 사업부장님이 시킨 일이 있는데 '상위 기획서 나오면 한번 보시죠.'라고 찍어서 말씀하셨고 곧 어떻게 되고 있는지 찾으실 것 같다고, 기획서 초안을 언제까지 작성할 수 있겠는지 물어보셨다. 급한 일인 것 같아, 다음 주까지는 어떻게든 해서 가져오겠다고 했다. 업무시간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휴일과 주말을 모두 할애하여 기획서를 작성해 갔다. 시간이 없다 보니 출근길 지하철에서, 퇴근길 버스에서, 아이를 재우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아이디어를 정리해 나갔다. 기획서를 다듬을 것을 고려해서 주초부터 미리 팀장님과 리뷰를 하고 다시 다듬고를 2번 반복하여 결국 약속한 일정에 기획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다음 주에 보고 일정이 잡혔고 내 것을 포함해서 우리 파트에서 2개의 안건이 함께 올라갔다. 팀장님과 우리 파트는 전날 늦게까지 그리고 보고 당일 아침 일찍 만나 보고 작전(?) 회의를 했고, 10시 보고 시간에 맞춰 회의실로 들어갔다. 팀장님이 내 안건이 메인이라고 하니 은근 긴장이 되고 부담도 됐지만, 딱히 기획서 상 걱정될만한 부분이 없기는 해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만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20분가량 첫 번째 안건에 대해 빠르게 보고가 진행되었고 연결해서 내 안건을 발표할 차례가 되었다. 팀장님이 "그러면 아까 말씀드렸던 두 번째 아젠다를.." 하고 이야기하는데 사업부장님이 다 듣기도 전에 "저건 안 해도 될 것 같아요."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 저건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네, 지금 저런 게 필요할까 싶어요. 할 일도 많은데 홀딩합시다."
팀장님이 내 기획서를 열어 '이거 팀원이 다 준비했는데..'라고 하며 정말 하지 말자는 것인지 한번 더 확인했으나, 사업부장님은 딱 잘라 홀딩하자고 하시고는, 왜 할 필요가 없는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서수까지 붙여가며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셨다.
도대체 왜 열흘 전에(오래 전도 아니다) 이 일을 시켰으며, 왜 상위 기획서 나오면 보자고 하신 걸까? 헛웃음만 나왔다. 나는 지시 한마디에 없는 시간 쪼개서 어떻게든 일정 내에 기획서를 완성하려고 애를 썼는데, 정작 그 일을 시킨 사람은 들어보지도 않고 그 일을 굳이 왜 하냐는 식으로 말을 잘라버리니 너무 황당했다. 이를 꽉 깨물고 표정관리를 하고 앉아 있었지만 회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보고가 끝나고 사업부장님이 나가시자 팀장님이 내 등을 쓸어내리며 "어휴 고생했는데 어떡해..."라고 하는데 나는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하고 싶은 거 다 묻어두고 하기 싫어도 시키는 것 일정에 맞춰 최대한 해내려고 항상 애썼는데 이것이 그 결과인가 생각하니 억울하고 화가 났다. 7년 전 이전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전 직장은 조직 규모가 더 크고 보고 체계가 더 복잡했는데, 어쩌다가 일개 팀원으로서 본부장에게 보고할 기회가 생겼는데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때도 (언제나처럼) 주말까지 현장에 가서 리허설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시연할 데모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체크했고, 혹시 발생할 예외 상황에 대해서도 단단히 대비를 했다. 하지만 본부장이 내 보고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지나가버렸고 데모는 아예 시연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도 참.. 당시 팀장님과 연구소장님이 망연자실한 나를 달래주려고 애쓰셨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감사하다.
10시 보고가 그렇게 끝나고, 한바탕 울고 나서 같은 팀원 제안으로 맛있는 떡볶이를 먹으며 정신 차리고 오후에도 열심히 일을 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더욱더 일에 어떤 욕심이나 집착이 없이 마음이 내려놔졌고, 동시에 나의 못난 마음들을 조금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 파트는 세명인데 나는 그중에서 딱 중간 연차다. 나보다 어린 동료보다는 은근히 내가 더 빛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못난 마음, 가끔은 일은 너무 잘하는 나보다 나이 많은 동료를 이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못난 마음. 그런 마음들은 깨끗이 씻어내고 서로서로 잘 서포트하고 이끌어주며 우리 셋 다 각자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