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바리 오타쿠의 기쁨과 슬픔
"넌 뭘 좋아해?, 취미가 뭐야?, 가수는 누굴 좋아해?"
누구나 서로를 알아가면서 자주 묻게 되는 말이다. 특히 저런 질문을 나 스스로도 하게 된 건 브랜딩과 마케팅을 업으로 가지게 되면서부터였다. 이 질문에 대해 항상 드는 생각은 나는 덕후 기질을 반만 타고난 잔잔바리 오타쿠라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 꺼내려들면 대학시절 들었던 교양 수업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대학 다니며 배운 것 중 인생에 학문적으로 도움이 되는 유일한 교양 이론,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 flow]에 관한 이야기도 항상 떠오른다. 대충 수업을 듣다보면 [초집중 상태, 무아의 지경] 따위가 떠오르면서 몰입이란 걸 내가 해본 적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으로 열반에 든 부다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옆을 보면 동기 몇 명이 무아의 지경으로 졸고 있곤 했다. 그만큼 나에게 몰입에 가까운 덕질은 좀 불가능했던 거다.
대신 은근히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고, 한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온갖 에너지를 모아 그 분야를 탐독하고 휘발하듯 관심이 꺼진다. 아래 이야기는 나의 잔잔바리 덕질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음악/ 만화/ 드라마/ 캠핑 등 몇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길어지면 편수를 나눠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음악편
학창 시절, 아이돌이나 가수 덕질을 해본 적이 없다. 특정 아이돌보단 특정 앨범이나 노래, 뮤직비디오를 좋아했다. 좋아하더라도 그 노래가 풍기는 분위기나 가사를 좋아했고 뮤직비디오에서는 아이돌의 얼굴보다는 미장센을 좋아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에도 god를 좋아하긴 했는데, 엄마가 CD를 사줘서 주구장창 들었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이 넌 god야 신화야? 라며 사상검증을 하듯 따져 물을 때도 그랬다. "난 모두의 팬이야~"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는 "god팬이야"라고 대답했고 "god 누구 팬인데?" 어쩐지 나는 그나마 제일 좋아하는 것 같은 멤버를 좋아한다고 나 자신을 세뇌시키곤 말했다. "손호영"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90년대 말, 이천년대 초 인디밴드들을 좋아했고, 브리티쉬 밴드/얼터너티브 밴드 등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집에 있었던 양면으로 된 비틀스 CD 덕분인지도 모른다. CD에서 나오는 매 트랙의 마지막 즈음에는 자동으로 다음 트랙의 멜로디가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곤 했었다. 한편 집 데스크톱으로 하루 종일 블로그 따위를 서핑하며 새로운 노래를 찾아다녔다. 당시만 해도 블로그에 음원을 올리는 일이 많은 저작권 대해적 시대라 나랑 취향이 맞는 블로거 한 명을 찾으면 귀가 즐거워졌었지. 지금으로 치면 홍대병 말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가사를 다 외우거나 밴드 멤버의 나이와 이름을 외우는 일은 없었다. 쫓아다니지도, 찾아다니지도 않았지만, 좋아하는 노래는 몇 날 며칠 1곡 반복으로 귀가 떨어질 때까지 들었던 것 같다. 대학시절에는 10cm, 브라운 아이드 소울, 검정치마, 가을방학 최근에는 프렙이나 트로이 시반, 새소년 노래가 좋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특정 가수를 좋아하기보다는 특정 노래들을 좋아한다.
잔잔바리로 좋아하던 음악들은 결혼식 때 Track list를 고르는데 그나마 제일 쓸모가 있었다. 직접 만든 식전 영상에서는 가을방학의 여배우(실내악외출버전이어야 한다), 어쿠스틱카페의 노래로 어머니들이 입장하고, 트레비스의 Flowers in the window를 들으며 퇴장하고, 사진을 찍으며 에드 시런의 castle on the hill을 들었다. 결혼식에서 제일 신경 쓴 게 Track list일 정도로 진심이었는데, 그 누가 알아주었을는지. 사실 결혼식에서 많이 사용되지 않는 무드의 노래들을 더 넣고 싶었는데, 용기가 나질 않아 이 정도로 그쳤다. (크랜베리스라던가...)
만화편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1일 1 만화방 하는 새나라의 어린이였다. 중,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안 읽은 만화책이 없을 정도로 만화책을 읽었다. 그나마 제일 덕후에 가깝다면, 역시 덕후의 원조 만화책이 내 잔잔바리 덕질의 최고봉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년만화, 순정만화 가리지 않고 읽었고 그 명맥은 비록 고3 이후 끊겼었지만 최근 갑자기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귀멸의 칼날" 때문에 다시 불지펴지고 있다.
만화는 가리는 것 없이 섭렵했다. 소년만화, 순정만화 등 그 시절에는 안 본 게 없을 정도로 많이 봤다. 그중에서도 학창 시절 나를 건드렸던 것은 역시 소녀이기에 (ㅎㅎ) 야자와 아이의 작품들과, 마츠모토 토모의 KISS였다. 야자와 아이의 내 남자친구 이야기와 파라다이스키스, 마츠모토 토모의 KISS는 소장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본가 내 방에 처박혀 있을 것 같은데
'나나'가 극장에서 개봉했을 때, 친구와 함께 보고선 열띤 논평도 했었다. 야자와 아이의 만화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설레었던 이유는 지금 와서 짐작하건대 바로 '어른의 삶'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나가 비비안 웨스트우드 옷을 입고, 태우고 싶은 담배를 피우고, 만나고 싶은 남자를 만나는 모습에서 느낀 자유와 방종의 맛! 조지로 인해 몰라도 될 세상을 알아버린 유카리, 파란 머리 싹퉁바가지 죠지는 그래도 어쩐지 너무나 좋았다. 순수한 것 같지만 발칙했던 미와코까지. 전부 똑같은 옷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만 들여다보는 나와 내 친구들과는 너무 다른 인생. 파라다이스 키스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른인 것 같이 살아가는 만화책 속 캐릭터들에 대한 대리 일탈의 명목도 있었을 거다.
마츠모토 토모는 모든 작품들이 성공을 거두다시피 한 야자와 아이와는 다르게 가수로 치면 "원히트 원더"가 아닐까 싶다. 물론 마츠모토 토모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했고 최근에도 하고 있다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KISS"만큼의 파급력을 준 만화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야 마츠모토 토모가 몇 살 때 KISS를 그렸는지 궁금하다. 학창 시절 읽을 때만 해도 고시마 선생이 너무나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직장인이 돼서 다시 읽을 때 고시마가 겨우 이십 대 중반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배신감이란. 담백한 그림체에 얹어진 피아노 학원 선생님 고시마와, 평범하지만 예쁜 학생 카에의 사랑이야기는 현실에서라면 치를 떨만한 이야기지만, 만화적 허용 덕분인지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설렘이 부족할 때면 만화책을 꺼내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어른과의 사랑을 꿈꾸곤 했다. 진짜 철이 없게도 이상형이 10살 연상의 직장인(...)이었다고 한다. 고시마 선생의 약간은 벙벙한 양복차림, 피아노 학원의 정적인 풍경, 웃는 카에의 모습이 마치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처럼 잘 연출된 만화책이다. 일본 버블시대의 풍경도 아련히 떠오르는 것 같다.
KISS에는 다양한 피아노곡이 나오는데, 조지 윈스턴의 캐논과 Patti Austin의 Say you love me을 특히 좋아한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피아노 버전으로 발매한 KISS OST도 있다.) 각 에피소드마다 한 가지 이상의 피아노곡들이 나오면서 담백하고 절묘한 사랑이야기와 버무려지는데, 지금 봐도 다시 설레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위 작품들 외에도 원피스, 블리치, 나루토, 슬램덩크, 베가본드, 몬스터, 암행어사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만화책을 읽어댔지만, 굿즈를 산다거나 특정 만화의 덕질로 2차 창작을 한다거나 하기보다는 새로운 세계관과 인물들을 만나는 일이 재밌어서 만화에 빠졌던 것 같다.
요즘은 주술 회전, 귀멸의 칼날, 헌터 헌터를 재밌게 봤는데-헌터 헌터는 아직도 연재 제대로 안 되는 게 레전드- 누가 왕년의 만화 덕후 아니랄까봐 넷플릭스에서 귀멸의 칼날을 만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정주행을 끝냈으며 뒷 이야기는 모두 그다음 일주일 동안 만화책으로 완독 해버렸다.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주인공 탄지로 말고는 캐릭터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기현상..) 만화책을 읽으면 꺼무위키를 끌 수가 없다. 만화책을 읽다 보면 궁금한 세계관에 대한 부분을 다 알고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온갖 관련 영상도 다 섭렵해야 직성이 풀린다. 만화책의 특정 인물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세계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가는 재미, 그걸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 사람들의 해석을 즐기는 방법으로 만화책을 읽고 있다. (꺼무위키의 그 많은 만화 설명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입력하는 건지, 경외심과 더불어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만화책을 많이 읽은 건 참 도움이 되는 취미였던 것 같다. 상상과 감상을 키워줬다고 생각한다. 유치한 사랑 이야기들을 좋아했지만, 진짜 유치한 사랑만 한건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더 감성적인 어른으로 자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