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록

[독서록] 하얼빈

지은이 김훈

by 지공

하얼빈


세상에 쏘기 위해 총을 쥐어야 했던 청춘. 안중근.


<문서를 써주고 나라를 넘기는 일은 만고에 없습니다.> 없어야 할 일이 벌어졌다. 상해에서 돌아와 조선 땅을 디딘 한 청년, 땅을 딛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의 비애가 온몸을 관통한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일어나는 수많은 의병들. 그걸 바라보는 청년. 뱉어내지 못해 들끓는 비애가 곧 결단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계획은 없다. 오로지 결심만이 있을 뿐이다. 결심 위를 걷고 걸어 하얼빈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주한다. 그래서 쏘았다. 하지만 끝나진 않았다. 마음속에 있는 총알을 마저 쏴야 했기에.


저자와 책


내가 김훈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조금은 무모한 일 때문이었다. 당시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단편 소설을 쓰고 있었다. 초고를 완성하자마자 여자인 친구에게 감상을 부탁했다. 남성으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친구가 조심스럽게 감상을 말하며 김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곧 글에서 그 소재를 뺐고, 나의 무모함에 한동안 낯이 뜨거웠다. 그 후 애석하게도 나에게 김훈 하면 언니의 폐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훈 하면 문장이라고 말한다. 연필처럼 말을 깎고 깎아 툭 던지는 문체.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장의 장인이 빚어낸 문장들은 너무나도 담백해, 문장이 아닌 서사에 집중하게 된다고도 한다. 비루하게나마 글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글은 복잡하고 화려하게 풀어내는 것보다 단출하지만 명료하게 명중해 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 그런 깨달음에도, 요즘 나는 글을 쓸 때 서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구구절절 문장에 집착할 때가 있다. 나를 다시 한번 일깨워줬으면 하는 맘에 이 책을, 이 저자를 골랐다.


이 땅 위에 운신하는 자라면 책의 제목만 보고도 떠올린다. 손바닥, 총, 거사, 그리고 그것들이 귀결하는 한 영웅을. 하지만 책은 예고한다. 영웅의 그늘을 걷어 낸, 사람 안중근을 이야기할 거라고. 그래서 책의 표지에는 총도 없고 안중근의 결연한 손바닥도 없다. 그가 향했던 곳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하얼빈. 두 인물의 만남을 은유하듯, 세 글자의 중심부엔 균열이 그어져 있다. 한쪽은 짙어지고, 다른 한쪽은 이지러지는 균열. 마치 짙어지는 한쪽이 쏜 탄도와도 같은 곧은 균열.


저자의 글을 닮은 담백한 이 제목을 처음엔 저자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찾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저자가 생각한 제목은 「하얼빈에서 만나자」 였는데, 그걸 편집자가 세 글자로 바꾼 것이라 한다. 단 세 글자의 무정함에서, 오히려 안중근이 더 깊게 다가온다.


고단했던 청춘 시절, 저자는 안중근의 공판기록을 읽으며 영웅 안중근이 아니라 그의 빛나는 청춘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 안중근을 글로 쓰겠다 마음먹었다. 하지만 마음만 먹었을 뿐 쓸 수 없었다.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하얼빈이 출간됐다. 50년간 주저했지만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기에, 세상에 나왔다.

"젊었을 때 신문조서를 읽었다. 문학작품도 아닌 기록물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기막힌 한 세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충격을 받았고,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것을 50년 후에야 겨우 쓴 것이다."
출처 : CBS김현정의뉴스쇼 <김훈 작가 "나는 왜 안중근에 50년을 매달렸나?">


감상 : 다만 그래야 했던 청춘, 안중근.


한줄평

안중근의 당연한 면모를 말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안중근은 영웅이 아니며, 거사는 거사가 아니다. 총구의 섬광처럼 빛났던 청춘의 안중근, 다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책은 시종일관 담담하다. 우리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는 영웅이 아니다. 우리가 거사라고 부르는 그 일도 더 이상 거사가 아니다. 이 책 속에는, 다만 청년 안중근이 있고 그가 다만 행한 일이 있을 뿐이다.

—안의 제안에 대해서 그대는 뭐라고 말했나
—다만, 함께 가자고 했다.

"다만." 작품 속에서 안중근이 아닌 그와 동행한 우덕순의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말처럼 머릿속이 찌릿했다. 내가 살면서 아무런 이유를 달지 않고 다만 해야 했기에 했던 일은 무엇인가. 안중근의 청춘을 보면서 아직은 겨우겨우 진행되고 있는, 곧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릴 나의 청춘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야기는 줄곧 인물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며 서술된다. 조선에서 벌어지는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순행을 떠나는 이토, 세태를 고요하게 바라보다 결국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안중근. 그 두 인물들의 결심이 깊어질수록, 둘은 하얼빈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일은 벌어진다. 하지만 총성은 고요하다. 시끄러운 것은 총을 쥔 자의 마음이다. 저자는 총성이 아닌, 총을 쥔 청년 안중근에게 집중한다. 첫 발의 비장함이 아니라, 명중했음을 온몸으로 느꼈으면서도 총에서 손가락을 뗄 수 없었던 이유에 깊게 파고든다.


호송되는 안중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다.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니다. 이토는 죽었는가? 이토가 죽었다면 속에 있는 말들은 누구에게 해야만 하는가. 이토가 죽지 않았다면 말을 한들 그것이 세상에 전달될 수 있는가. 그에게 있어 총알은 총에 있지 않았다. 그가 쏘려고 했던 진정한 총알은 그의 심장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깊게 새겨진 그 말들을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될까 불안해했다.

안중근의 체포 직후(왼) 모습과 순국하기 직전(우) 모습 (출처 : 안중근의사기념관)

이토가 죽었음을 알게 된 안중근은 불안을 버린다. 아니 불안할 틈이 없다. 세상에 말을 전해야 했다. 진정한 총성은 이제부터 울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해야 하는 말을 정확히 아는 자의 말은 총보다 더 의도적이고,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맞서는 자의 말은 총알보다 더 파괴적이다. 안중근의 말뜻이 명확해질수록, 상대의 불순한 생각과 교묘한 행동도 선명해진다. 안중근은 마지막 총알을 쏘았고, 죽음을 향해 의연하게 걸어 나간다. 저자가 서술하는 한 청춘의 끝은 너무나도 고요해, 더욱 가슴이 저린다.


좋았던 점


내면 묘사가 거칠면서도 섬세하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정말 그렇다. 담백하고 투박한 문체에서 이러한 섬세한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안중근과 우덕순의 대화는 모조리 필사해 두었다. 투박한 대화에 웃음이 나다가도, 나보다 어렸던 두 청춘이 총알을 나누는 걸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려온다.

책을 읽는 내내 긴장해야 했는데, 서술 방법이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서술자는 전지적이기에, 이야기 속 모든 인물에게 공평하다. 어느 인물에 관해서든 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토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부분을 읽을 때면 그의 심리에 동화되어 가는 느낌이 간혹 들었다. 저자의 문체가 담백해서 더욱 그랬다. 그러기에 글을 읽으면서도 글 밖으로 살짝 나와 이토라는 인물에 대해 상기하며 책을 읽어야 했다. 만약 서정적인 문체를 지닌 작가였다면, 같은 형식의 조건에서 어떤 작품을 써 내려갔을지 궁금하다.


아쉬웠던 점


하얼빈으로 향했던 이는 두 인물 말고도 또 있다. 안중근의 처 김아려 여사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김아려의 비중이 제법 되었다. 중후반부 비중이 제법 높은 우덕순조차 단독 서술 장이 존재하지 않는데 반해, 김아려라는 인물의 단독 서술 장이 몇 있다. 하지만 글의 후반부로 갈수록 김아려라는 인물을 급하게 마무리해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에 인터뷰를 보니 저자 본인도 퇴고 과정에서 글을 대폭 줄이면서, 김아려와 관련한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아쉽다고.


기억


—총을 많이 쏘아보았는가?
—많이 쏘지는 않았다. 나는 사냥꾼이 아니지만 이토는 꿩보다 덩치가 크니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나는 이토의 덩치가 너무 작아서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다.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웃음은 흐렸고 소리 끝이 어둠에 스몄다.

(안중근과 우덕순)


저것이 이토로구나...... 저 작고 괴죄죄한 늙은이가...... 저 오종종한 것이......

(하얼빈 역, 열차에서 내리는 이토를 마주한 안중근.)


......여기까지 오기는 왔구나. 여기서부터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구나. 여기서부터 다시 가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서부터 사형장까지......말을 하면서......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말들은 탄창 속으로 들어가서 발사되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가 총 밖으로 나와서 긴 대열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재판이 시작되고, 안중근은 말한다.)


이 같은 토털 픽처를 만드는 일은 글쓰는 자의 즐거움일 테지만, 즐거움은 잠깐 뿐이고 연필을 쥐고 책상에 앉으면 말을 듣지 않는 말을 부려서 목표를 향해 끌고 나가는 노동의 날들이 계속되지만, 이런 수고로움을 길게 말하는 일은 너절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본문인용출처 : 하얼빈
(지은이 : 김훈, 펴낸이 : 김소영, 펴낸곳 : (주)문학동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