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록

[독서록] 침입자들

지은이 정혁용

by 지공

침입자들


과거에 대해서는 되도록 얘기하고 싶지 않다. 구질구질하다는 뜻이다.


구질구질한 과거와 이별한 한 남자, 숙소제공이라는 한 구절에 이끌려 택배 기사가 된다. 코드명은 행운동, 담당 지역이 행운동이니까. 상자를 매개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과, 사람이라는 상자 속에 담겨 있는 그들의 인생. 그리고 아주 약간의 하드보일드?


저자와 책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다.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20년에 출간된 침입자들이 작가의 첫 단독 출간 책인 듯했다. 재작년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데이비드 발다치)>에 꽤 실망하고, 다른 하드보일드 소설을 찾다가 읽게 된 책으로 기억한다. 2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썼던 독서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글을 섹시하게 쓴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정작 작가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이지만 아무튼 그랬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이니까?


글에서 묻어나는 인색한 유머. 그게 좋다. 그렇다고 저자 또한 인색할 것 같다는 건 아니다. 진짜 옹졸한 사람의 글은 옹졸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제 옹졸함을 인정할 그릇이 못 되기에 오히려 철저하게 감추는 쪽을 택하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 정혁용 작가의 글에는, 내려놓지 못해 쩨쩨했던 자신의 과거를 남일처럼 비웃는 듯한 냉소가 묻어있다. 그래서 피식거리게 된다. 그 피식거림에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들도 조금 섞여 빠져나간다.

tempImageRfnUjY.heic

표지가 아쉽다. 글을 어느 정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관통력은 없다. 제목의 서체도 글과는 이질적이다. 표지는 글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의 문은 독자를 환영하는 느낌이 딱히 들지는 않는다. 물론 겉보단 속이 중요하다. 하지만 겉이 독자를 이끄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나 출판 매체가 사그라드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좋아하는 작가인만큼 더 많은 독자가 있었으면 하기에 표지에 대해 아쉬운 맘은 지울 수가 없다. 표지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정혁용 장편소설"이라는 문구다. 작가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를 읽고 나니, 저 문구가 괜히 감상적이다. 단편처럼 이어지던 삶 속에서, 자신의 이름 아래에 놓인 장편이라는 말을 봤을 때 작가의 맘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에세이 <문 밖의 사람>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아니면 나처럼 이 책을 먼저 읽고 에세이를 읽은 후 다시 이 책을 읽는 것도 좋다. 그럼 아주 많은 부분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소설가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지 그 집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작품에 묻어난 저자의 노고, 그 노고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삶의 고단함,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 버텨주는 동반자를 향한 믿음.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저자가 택배 배송을 하며 틈틈이 휴대폰으로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작가의 말이 이어지기 전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내에게라는 네 글자만이 오롯하게 적혀 있다. 구질구질하지 않다. 작가 본인답게 글을 바친다. 조건 없는 신뢰에 답하는 군더더기 없는 감사의 말. 글을 선물 받은 당사자에게 저 네 글자가 어떠한 말보다도 깊게 다가갔으리라 생각한다.


감상 : 하드보일드하지 않은 자의 하드보일드


한줄평

상자를 들고 남의 집 문 앞에 서는 자. 침입해야 하는 쪽은 자신이건만, 왠지 자꾸 당하기만 하는 한 택배기사의 구질구질한 배송일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펴낸 곳에서는 이 책을 한국형 하드보일드 소설의 탄생이라고 소개한다. 내가 아는 하드보일드는 건조함을 깔고 간다. 사람, 인생, 세상을 향한 비정함. 이 글의 주인공 또한 건조하다. 아니, 그러려고 애를 쓴다. 타인을 향한 의도적인 무심함, 대화인지 빈정대는 건지 모를 묘한 말투, 그저 살아있기에 사는 듯한 삶에 대한 태도. 하지만 애만 쓸 뿐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하드보일드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기에 주인공은 늘 침입당한다. 노망 난 경제학박사, 미쳐버린 마이클, 폐지 줍는 마스크, 지게꾼의 아들, 마이킹에 묶인 여자를 사랑하는 청년,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한 여자까지. 행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운동에서 택배를 배송하며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삶. 택배 차 조수석에 앉아 그들에게 침입당하는 주인공을 지켜보며 피식거리는 것처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론, 이 책에서 하드보일드를 찾아보라면 "글쎄?"다. 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공의 진짜 코드명이 불리며 후속작 「파괴자들」에서 이어질 진짜 하드보일드를 예고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미워할 수는 없다. 아닌 척 냉소라는 포장지로 꽁꽁 싸매 던져대는 이타심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몽글거리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기도 하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과 그를 온전하게 담아낸 재치 있는 문장 때문이다.


좋았던 점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 그 속에 절묘하게 녹여낸 위트.

일상과 밀접한 소재를 매개로 풀어낸 보통 사람들의 보통스럽지 않은 인생 이야기.

글 속에 짙게 묻어 있는 저자와 저자의 인생 냄새. (특히 에세이를 읽고 나면 더욱 짙게 느껴진다.)

삶을 둘러싼 모호한 관념들을 쪼개어 또렷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


아쉬웠던 점


오로지 하드보일드를 생각하고 이 책을 접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진짜 하드보일드는 후속 책 <파괴자들>에서 이어진다.

인용이 참 많다. 상상 이상으로 많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 본인도 직접 인용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인용된 책이나 영화 등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 많기에 인용했다고는 하지만, 그 빈도가 너무 높고 분량도 길어질 때가 있어 독자에 따라서는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에세이를 읽고 느낀 거지만, 소설의 주인공과 저자가 너무나도 닮아있다. 이 부분을 아쉬운 점에 넣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넣은 이유는, 그게 소설가가 넘어야 할 벽 중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인터뷰를 보니 차기 작품이 곧 나온다고 들었는데 어떤 주인공을 내세웠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기억


나 정도의 키에 서른 후반으로 보였는데 인상이 더러웠다. 오랜 시간 성실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얼굴이었다.

(혼자 티키타카 드리블하는 위트가 글을 루즈하지 않게 단단히 잡아준다.)


하지만 임신부라고 그 성질머리까지 참아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데 여자가 말했다.
"난 임신부라고."
여자의 말투에는 여전히 짜증과 화가 묻어 있었다.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그래서요? 제 애는 아니잖아요."
밖을 나오니 비는 그쳐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마주한 진상 수취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고 그 말을 인용하면 자신이 근사해 보이나요?"

(인용이 과할 정도로 많긴 하다. 왠지 이 대사가 저자 자신에게 던지는 말인 듯도 싶었다.)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중략)사회는 가족관계라고 하면 가족이 항상 중심이지 않습니까? 비로소 저는 관계로 중심이 옮아가더군요. 관계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끊을 수 있는 거라고. 앞의 단어가 붙었다 해도 역시 관계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말들 속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방식이 좋았다.)


본문인용출처 : 침입자들
(지은이 : 정혁용, 펴낸이 : 김선식, 펴낸곳 : 다산북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