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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Feb 17. 2019

안동을 찾아서

48년만의 고향 방문

1970년 초 겨울방학 중에 집이 안동에서 서울로 이사갔다. 4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어언 4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동안 안동에 간 적은 여러 번이었으나 안동 시내에 머문 적은 없었다. 시내를 통과해 조상 묘가 있는 예안면의 가래골과 도산면 서부리에 가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안동 시내에 6박 7일 동안 머물렀다.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그동안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원 없이 풀었다. 오전에는 강의하고 오후 내내 해질 때까지 자전거를 타고 골목골목을 다녔다. 물론 그래도 못 가본 곳이 많겠지만 웬만큼은 둘러보았다.


이번에 6박 7일로 안동에 가게 된 건 경북코리아콘텐츠랩에서 주관하는 강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기초가 튼튼한 글쓰기'라는 제목은 내가 잡았다. 첫날 스무 명 가깝던 인원은 이튿날 대폭 줄더니 끝까지 남은 이는 9명이었다. 딱딱한 논설문 예를 놓고 씨름하느라 수강생들이 하루하루가 버거웠을 것 같다.


                         1일


2월 10일(일)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안동터미널에 내렸다. 시내 곳곳을 둘러보고자 아예 작정을 하고 접이식자전거를 싣고 갔다.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당장 터미널에서 내려서부터 버스나 택시를 기다릴 필요 없이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강의 장소는 안동역 앞이었지만 일부러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평화동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평화동 건너 태화동엔 모텔이 많아 몇 군데 들어가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한 곳으로 정했다. 들게 된 3층의 방은 널찍했고 TV는 물론 컴퓨터까지 있었다. 다만 열쇠를 주지 않아 좀 께름칙했다. 처음 지을 땐 방마다 열쇠가 있었겠지만 오래 영업하는 중에 열쇠가 필요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 같은 손님은 좀 당황스러웠다.


짐을 풀자마자 바로 평화동으로 갔다. 먼저 머리를 깎을 데를 찾았다. 일요일이라 이발관은 연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잘랐다. 주인은 안동 용상 토박이인데 대구에서 좀 살다가 다시 안동으로 돌아와 그곳에 자리잡았다 했다. 평화동 길 건너 안기동이었다.


평화동은 고향 떠나온 후 처음은 아니었다. 전에도 예안 다녀가면서 한두 번 평화동에 들러 골목을 헤집고 다니면서 옛날 우리집이 어딘가 하고 두리번거렸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못 찾았지만 이 날도 예전 살던 철도관사 우리집 자리가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 길 구획은 대체로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집이 모두 새로 지어져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4학년까지 다녔던 초등학교도 그 자리에 있었으나 건물은 모두 새로 지어져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1학년 때 교실은 남쪽 큰길 가에 있었는데 당시엔 단층이었는데 지금은 2층 건물이었다. 4학년 때 교실은 목조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운동장 일부는 테니스장이 들어섰다.


                         2일


10시 강의를 위해 자전거를 타고 경북문화콘텐츠진흥원으로 향했다. 줄기차게 직진해서 달리니 10여 분만에 강의 장소 근처에 이르렀다. 안동역 앞 갈비골목 부근이었다. 한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진흥원으로 들어섰다. 수강생이 20명 가까이 됐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고향에 와서 강의하는 감회가 깊음을 말했다. 그러나 수강생들은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내 벅찬 감정을 잘 전달하지 못했다.


2시간의 강의가 끝났을 때 초등 동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같이하기로 이미 약속을 한 터였다. 친구의 승용차는 낙동강을 건넜다. 안동병원을 지나 무주무의 한 국수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근처 매운탕집으로 갔다. 참으로 한적한 곳이었다. 식당은 품격 있었고 음식은 훌륭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있는 매운탕이었다.


무주무를 나와 영호루로 갔다. 어렸을 때도 숱하게 들어본 영호루지만 영호루에 올라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이 영호루에 올라본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강 건너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친구가 하나하나 건물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옛날 교도소 자리엔 뭐가 들어서고 어느 학교는 어디로 옮겼으며...... 그는 안동에서만 살았으니 모든 것이 손바닥 안이다.


친구가 내 자전거가 있는 진흥원에 나를 데려다주고 떠났다.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다시 시내로 갔다. 4학년 때 평화동에서 명륜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매일 하교 후 명륜동 집으로 갈 때 걸었던 길을 지나갔다. 성소병원과 안동교회... 안동교회 옆은 성당이 있었다. 언덕 위의 성당은 예전엔 없었던 거 같았지만 큰길 가에 있는 교회사연구소 건물은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야말로 고색창연했다.


더 동쪽으로 달려보았다. 동부초등학교 부근은 어렸을 때 가보지 않았던 곳이다. 지금 그곳 부근 마을은 온통 담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마을이 돼 있었다. 다른 도시의 벽화마을도 몇 가보았지만 이곳 벽화마을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그림이 아주 다양했다. 커다란 인물화가 있는가 하면 악기 연주하는 모습도 있고...


그곳을 지나니 옛 교도소 자리엔 커다란 절이 들어서 있었다. 영남산 해동사였다. 해동사를 지나 임청각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였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몸 바친 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생가였다. 선생의 집안은 온 재산을 바쳐 독립 투쟁에 힘썼다. 임청각 옆에는 국보인 신세동7층전탑이 있었다.


자전거가 없었다면 안동 시내 동쪽 끝에서 태화동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택시를 타면 되긴 하지만... 해가 완전히 진 뒤 숙소로 돌아왔다.


다른 한 친구와 저녁 약속이 돼 있었다. 그와 만나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2차는 신시장 안의 횟집으로 갔다. 회가 양이 여간 많지 않았다. 친구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가 불러낸 친구는 나도 아는 이였다. 5학년 1년은 교대부국으로 전학 가서 다녔는데 그 학교에서 한 반이었던 친구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학교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였다. 셋이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3차는 내 숙소 아주 가까운 곳에 와서 했다.



                         3일


둘쨋날 강의를 마치고는 시내 한복판을 훑어보기로 작정하여 구시장 골목골목을 둘러보았다. 안동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장춘당약국'은 어렸을 때 많이 들어본 곳인데 지금도 있었다. '스쿨서점'이 있나 찾아보았으나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구시장과 그 부근 번화가를 이곳저곳 다니면서 살펴보았다. 운흥동, 동부동, 법흥동, 신세동까지 이리저리 다녀보았다. 안동역 앞으로 왔다. 안동역은 이제 1~2년 후에는 사라진다. 안동 서쪽 터미널 부근에 새 역을 짓고 있는데 새 역이 완성되면 지금 안동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역 앞 광장에서 '안동역에서'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작사자가 안동사람이다. 가수 진성은 타지 출신이지만...


안동역 앞 파출소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내게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초등 때 하도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아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교육을 잘 받았다. 어느 날 안동역 부근에서 학교에서 배운, 수상한 행동을 한 사람을 발견하고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경찰관이 문제의 아저씨를 상대로 파출소 앞 광장에서 심문을 하던 것을 저 멀리서 나와 다른 한 친구 둘이서 지켜봤던 것이다. 경찰관과 그 아저씨 주변엔 사람이 많이  몰려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왜 경찰관이 파출소 안으로 데려가서 묻지 않고 길에서 그랬는지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간첩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구시장 번화가를 얼추 다 훑은 뒤 사장둑을 넘어 신시장쪽으로 갔다. 신시장은 엄청나게 컸다. 바둑판처럼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길을 건너도 가 보았다. 안흥동과 옥야동이었다. 옥야동에 초등학교 같은 곳이 있었지만 예전에 영호초등학교였는데 지금은 교육지원청 소속 학교교육지원센터였다. 아주 오래 전엔 안동여고 자리였다고 한다.


광석동으로 왔다. 서부초등 가까운 곳이다. 이곳도 드문드문 옞 모습을 간직한 집이 더러 있었다. 이 동네에 서부초등 동창들이 많이 살았었다. 안동 시내 한복판을 웬만큼은 둘러보았다.



                        4일


3일째 강의는 매우 무거운 내용이어서 수강생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문법'이 얼마나 딱딱한가. 하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수강생들이 한결 줄어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좀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용상쪽으로 향했다. 새로 난 듯이 보이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니 용상, 아파트가 많았다. 오래된 5층짜리 아파트부터 새로 들어선 높은 아파트까지. 줄기차게 강변을 달렸다. 몇 해 전 모임이 있어 잠시 들렀던 카페 겸 펜션인 곳도 내려다보였다. 용상엔 아주 옛날엔 비행장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탈바꿈됐다. 안동고등학교도 아파트로 바뀌고 지금은 강 남쪽에 자리잡았다.


선어대에 이르렀다. 그 옆에 송제가 있었다. 낙동강 지류인 반면천이 굽어 보이는 곳이다. 과연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었다. 송제는 예전에 홍수를 막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던 곳에 세워졌다 한다. 저 멀리 안동대학교가 보였다. 그곳까지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왕 온 김에 가보기로 했다. 달려보니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는 드넓고 근사했다. 방학이라 조용했다.


다시 시내를 향했다. 용상에 이르렀다. 안동문화관광단지로 가기 위해 큰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짧은 터널을 지나니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됐다. 꽤나 길었다. 별세계에 온 듯했다. 골프장을 지나니 평지가 펼쳐졌다. 멀리 리첼호텔이 보였다. 그곳엔 전에 동창회 행사 참석을 위해 두 번쯤 묵은 적이 있다.


갑자기 내리막이 시작됐다. 안동댐 지역이었다. 세계물문화포럼센터가 있었다. 거대한 공원이었다. 전망대 겸 커피숍까지 가보았다. 댐이 가둔 물이 바다 같았다. 댐을 중간쯤까지 걸어보았다. 낮엔 개방되고 있다. 1976년 완공되었음을 알리는 다목적댐준공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오니 안동민속박물관 구역이었다. 골마다 기와집, 초가집이 들어차 있었다. 그저 멀리서 보기만 했다. 여유가 있으면 이 부근에서 묵으면서 느긋하게 둘러보면 좋겠다. 월영교를 건넜다. 드넓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시내로 들어가려면 강 따라 평지를 달려 신세동쪽으로 갈 수도 있고 언덕을 넘어서 갈 수도 있다. 언덕쪽을 택했다. 왜냐하면 신안동에 가기 위해선 언덕을 넘는 게 거리가 가까우니까. 그러나 시간은 훨씬 더 걸렸지 싶다. 언덕을 자전거를 끌고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안동엔 예전에 없던 학교가 있었다. 길원여고와 경일고가 그것이다. 경일고 문 앞까지 가보았다. 학교가 참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명륜동 옛 살던 곳까지 왔다. 가까이 가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리 집 앞의 큰 대궐 같은 집은 헐리고 공영주차장이 돼 있었다. 그러나 우리집 들어가는 좁디좁은 골목은 예전 그대로 있었고 살았던 집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 모든 집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보였다. 철 대문이 그대로인 게 놀라웠다. 비록 낡아서 으스러질 듯했지만...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집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잘 보기 위해 빙 둘러서 집 뒤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가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여름에 펌프로 물을 퍼서 등목하던 마당이 조금 보였다. 마당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지만...


명륜동 옛 집을 떠나 안동여중, 안동여고를 올라가 보았다. 이곳은 물론 처음 가본다. 내가 안동을 떠나올 땐 아직 이곳에 학교가 들어서기도 전이다. 학교가 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내가 굽어보였다. 학생들이 언덕을 올라 등교하느라 애를 먹었으리라. 시내 큰길까지 내려왔다. 대창빌딩을 만났다. 빌딩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작은 2층 집이지만 대창빌딩이란 명패가 붙어 있었다. 예전에도 1층이 레코드가게였다는데 지금도 그대로였다. 아마 주인은 바뀌었겠지만......


이번엔 안기동으로 향했다. 안기동주민센터까지 갔다. 되돌아올 땐 큰길이 아니라 동네 안길로 왔다. 예전에 안기천이던 곳은 다 복개가 돼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멀리 서쪽으론 높은 지대에 고층아파트가 서 있었으니 안기동이거나 운안동일 것이다. 가히 상전벽해다.



                             5일


나흘째 강의를 마치고는 안동 서부와 강남을 훑기로 했다. 옥동과 강남 말이다. 안동중학교는 참 가까이 있었다. 예전 경덕상고는 안동중앙고로 바뀌어 있었다. 경덕중학교는 그대로였지만... 옥동 가까이 접근하니  경사진 언덕길이어서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갔다.


옥동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간 번화가가 돼 있지 않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태화오거리로 가려다가 왼쪽으로 꼬부라져 동네 안길로 들어섰다. 서부교회 앞을 지났다. 동네에서 굉장히 멋진 한옥 한 채를 발견했다. 오래된 집 같진 않았지만 고풍스럽고 위엄 있어 보였다.


경북하이텍고가 나타났다. 예전 안동공고가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다. 옛 36사단 앞을 지나 송현사거리에 이르러 다시 옥동을 향해 올라갔다. 옥동 번화가를 둘러보고는 안동문화의거리에 비해 훨씬 북적임을 알았다. 상권이 대단해 보였다.


서서히 옥동을 빠져나왔다. 복주초등 옆을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큰길에 이르러 다시 좌회전했다. 멀리 새로 건설되는 기찻길이 보였다. 펼쳐진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경치에 넋을 잃었다. 학가산이 멀리 바라다보였다.


하이마삼거리를 지나 전에도 와본 적 있는 '피렌체'와 '고려정' 앞에 이르렀다. 4년 전 고려정에서 예전 이웃집에 살았던 두 노인을 몇 십 년만에 상봉하시게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옆집의 아주머니는 예전 가까이 살면서 참 친하게 지내셨다. 그러나 각각 97세, 87세가 돼 다시 만나니 별 말씀이 없으셨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다. 4년이 지난 이제 한 분은 이 세상 분이 아니시다.


한국생명과학고 앞을 지났다. 안동농업고등학교가 지금 이렇게 이름이 바뀌었다. 애초엔 안동농림학교였는데... 강 건너 무주무마을이 보였다. 도착 다음날 가보았지만 또 가보기로 하였다. 안동대교를 건너 안동병원 앞을 지나 무주무에 이르렀다. 마을은 깔끔했고 무척 조용했다.


그곳에서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포장된 조용한 동네길을 한 젊은이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스마트폰애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그러니 앞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자마자 그 젊은이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그는 당연히 내가 동네 어른이라 생각하고 인사했음이 분명했다. 무주무는 외지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지나는 사람은 당연히 동네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무주무 마을 젊은이들은 아마 다 그렇게 인사성이 바를 것이다. 그 젊은이만 그런 게 아니고... 모자를 눌러써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20대나 30대 같았다. 무주무는 안동 시내에서 다리만 하나 건너면 닿는 곳이지만 옛 예의범절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주무에서 나와 영호루까지는 강변에 난 자전거길을 달렸다. 도중에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만큼 호젓했다. 자동차 길로 달렸더라면 차 조심하느라 여간 긴장하지 않았을텐데 편하게 왔다. 강남은 대부분 정하동이었다. 법원과 검찰청이 있었다. 상가도 꽤나 번창해 보였다. 온천까지 있었다.


안동지청 앞에 원이엄마를 그리는 상이 서 있었다. 길을 건너니 아예 원이엄마테마공원이 있었다. 원이엄마는 500년도 더 전에 이 지역에 살다가 일찍 남편을 잃고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글 편지를 남긴 이다. 그 편지가 수백년만에 무덤 안에서 발견돼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남편 그리워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니 여인을 기려 이렇게 공원까지 만들었다.


귀래정, 명호서원, 반구정을 차례로 지났다. 고성이씨 가문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참으로 고색창연한 집들이다. 반면에 근처 예미정은 한옥이되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종가 음식 전문 음식점이었다. 서쪽의 정하동이 번잡한 도회지라면 길 건너 동쪽 정상동은 전통이 잘 보존된 지역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다른지!


용정교를 건너서 낙동강 이북으로 왔다. 안동문화예술의전당 앞으로 해서 다시 도심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얼추 안동 시내를 훑어보았다.


                        6일


마지막날이라 좀 일찍 일어났다. 아직 못 가 본 데를 가보기로 했다. 관왕묘와 이육사생가였다. 관왕묘는 경덕중학 옆에 있는데 서악사와 나란히 있었다. 서악사는 열려 있었지만 관왕묘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관왕묘는 삼국시대 관우의 묘를 중국의 명나라 장군이 안동에 와서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이육사생가도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태화오거리에서 가까웠다. 이육사 생가는 도산에 있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니 해체해서 안동 시내로 옮겨온 것이다.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에전에 기와집이 흔치 않았을텐데 육사 생가는 기와집이었다.


강의 마지막날이었다. 전날 작문을 하나씩 해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는데 하나하나 고쳐 주었다. 강의 마지막에는 질문, 대답 시간도 가졌다. 매일 일방적으로 혼자 이야기하다가 몇 사람의 질문을 받고서야 비로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얼 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그에 맞게 준비를 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마지막에 단체 사진을 찍었다. 놀라운 일이 있었다. 봉화 재산의 대안학교인 내일학교 학생들이 직접 키운 닭에서 난 달걀을 한 상자 선물로 주었다. 두루마리로 만 종이도 건네주었는데 한 사람씩 차례로 정성스레 쓴 인사가 적혀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았다. 선생님도 한 분 오셨는데 언제 한번 학교로 부르면 오겠느냐고 하셨다. 물으나마나다. 당연히 달려갈 것이다.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제 모든 볼일이 끝났다. 강의도 끝났고 시내 탐방도 마쳤다. 점심을 먹은 뒤 스타벅스로 갔다. 스마트폰에서 연락해야 할 친구들을 점찍은 뒤 한 사람씩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기도 했고 안 되기도 했다. 한 사람은 무슨 일로 전화를 했냐며 안동에 와 있다 하니 바로 달려나오겠다고 했다. 몸이 가장 불편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30분쯤 후 스타벅스로 왔다. 이야기를 두 시간 넘게 나눴다.


다른 친구들은 마침 그날 저녁 한 동창의 당구장 개업식에 오기로 돼서 모두들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 당구장에서 많은 동창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아예 생전 처음 보는 이였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안동에서 줄곧 살았더라면 이들과 어울려 살아왔겠지. 자정께야 고향 친구들과 헤어졌다.



                        7일


마지막 밤은 모텔이 아니고 찜질방에서 잤다. 바로 터미널로 갈 수도 있었으나 미련이 남아 시내를 더 둘러보기로 했다. 아니 무엇보다 서울 친구가 안동식혜 맛을 보고 싶어하니 그를 위해 안동식혜를 사가야 하기도 했다. 구시장에 가서 물으니 식혜 파는 곳을 알려주었다. 토석식당이란 곳이었다. 하지만 2시간 후에나 문을 연다고 했다.


신시장으로 갔다. 신시장 옆 커다란 마트에 가니 팔지 않았다. 시장 안에서 물어보니 한 가게를 알려주었다. 상호가 '안동식혜'였다. 한 통을 사서 택배로 보내달라 했다. 식혜 사는 일도 마쳤다.


점심은 안동에서의 마지막 식사인데 태화동 끝의 신라국밥집에서 하기로 했다. 11시가 문 여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맞추어 들어갔다. 시인이 직접 하는 식당인데 여간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맛도 있지만 양이 여간 풍성하지 않아서다. 주택가 한 구석에 이렇게 분주한 식당이 있을 줄 몰랐다. 이른 점심을 아주 든든하게 먹었다.


태화오거리, 송현사거리를 차례로 지나고 언덕을 넘었다. 6일 전 왔던 버스터미널에 다시 돌아왔다. 이제 서울로 돌아간다.


지난 세월 고향 안동을 늘 그리워했지만 안동에 올 일이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성묘나 동창회 행사로 후닥닥 왔다가 돌아가기 바빴다. 이번에 여러 날 머무르면서 원 없이 시내 곳곳을 둘러보았다. 몇 십 년 묵은 체증이 가시었다. 옛 시인은 "강산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라고 노래했다. 강산이 의구하지 않고 꽤나 변했다. 그렇게 변했지만 한편으로 옛 살던 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여간 다행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니 그렇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워낙 일찍 고향을 떠났기에 기억하는 옛 친구들이 많지 않다. 이번에 그 중 딱 한 친구를 다시 만났다. 웃는 모습이며 말투가 50년 전 그대로다. 다만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졌을 뿐... 기억나는 다른 몇 친구들은 지금 부산, 영천, 서울 등지에 살고 있다. 나도 많이 늙었다. 어린 소년이 이렇게나 나이 들었다. 숙원을 풀었다. 진작 찾아봐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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