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Sep 02. 2019

목적어가 필요 없는 말에 목적어를 쓰면 비문

자동사에는 목적어가 나와서는 안 되고 타동사에는 목적어가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은 문법의 기본이다. 아무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라고 하지 "많은 사람을 모였다."라고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모였다."는 비문이다. '모이다'는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인데 목적어를 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모이게 했다."나 "많은 사람을 모았다."는 말이 되지만 "많은 사람을 모였다."는 한눈에 비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자명한 이치가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민법에 있다. 제118조를 보자.


제118조(대리권의 범위) 권한을 정하지 아니한 대리인은 다음 각호의 행위만을 할 수 있다.

1. 보존행위

2.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그 이용 또는 개량하는 행위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고 했는데 참으로 의아하다. '변하다'는 위에서 본 '모이다'처럼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이다. '변하다'는 '무엇이 다른 것이 되거나 혹은 다른 성질로 달라지다.'라는 뜻으로 '~게 변하다', '~으로 변하다'로는 쓰일지언정 '~을 변하다'로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사람을 모이다'가 말이 안 되는 것만큼이나 '~을 변하다'는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이라고 했으니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변하다'가 목적어를 취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이라고 썼는지 모르겠으나 '~을 변하다'라는 쓰임은 국어에 없다. 민법은 국어 문법의 예외 지대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법률이야말로 가장 국어 문법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은 아래와 같이 '권리의 성질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는'으로 바꾸어야 비로소 문법에 맞는다. 법률의 비문을 바로잡아야 한다.


제118조(대리권의 범위) 권한을 정하지 아니한 대리인은 다음 각호의 행위만을 할 수 있다.

1. 보존행위

2.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게 하 아니하는 범위에서 그 이용 또는 개량하는 행위


다음 제121조에서도 문법에 어긋난 문장이 쓰이고 있다.


제121조(임의대리인의 복대리인선임의 책임) 

②대리인이 본인의 지명에 의하여 복대리인을 선임한 경우에는 그 부적임 또는 불성실함을 알고 본인에게 대한 통지나 그 해임을 태만한 때가 아니면 책임이 없다.


'본인에게 대한 통지나 그 해임을 태만한 때가 아니면'이라고 했다. '태만하다'는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없고 게으르다.'라는 뜻의 형용사다. 형용사는 목적어가 있을 수 없는 단어다. '무엇을 게으르다'가 말이 안 됨은 누구나  안다. '해임을 태만한'은 '해임을 게으른'이 잘못된 만큼이나 잘못된 표현이다. '태만하다'는 형용사일 뿐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 용법은 없다. 그런데도 '해임을 태만한'이라고 했다.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해임을 태만히 한'이라고 하든지 동사 '게을리하다'를 써서 '해임을 게을리한'이라고 해야 한다. 낡고 어려운 한자어인 '해태하다'를 써서 '해임을 해태한'이라고 해도 표현이 어려울 뿐 문법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해태하다'가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타동사이기 때문이다. '해임을 태만한'과 같은 어이없는 표현이 민법에 남아 있음은 놀랍다.


제121조(임의대리인의 복대리인선임의 책임) 

②대리인이 본인의 지명에 의하여 복대리인을 선임한 경우에는 그 부적임 또는 불성실함을 알고 본인에게 대한 통지나 그 해임을 태만 한 때가 아니면 책임이 없다.


제121조(임의대리인의 복대리인선임의 책임) 

②대리인이 본인의 지명에 의하여 복대리인을 선임한 경우에는 그 부적임 또는 불성실함을 알고 본인에게 대한 통지나 그 해임을 게을리한 때가 아니면 책임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없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