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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30. 2019

없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민법은 재산법과 가족법을 포괄하는 방대한 법으로 국민은 누구나 이를 지켜야 한다. 민법은 모든 국민의 생활을 규율하고 구속하기 때문에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씌어야 한다. 그러나 민법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게 단어를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민법의 제1편이 총칙이다. 총칙은 다시 다음과 같은 일곱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 총칙

제2장

제3장 법인

제4장 물건

제5장 법률행위

제6장 기간

제7장 소멸시효


그런데 제2장의 제목이 ''이다. 1958년 민법 제정 당시에는 법률이 국한 혼용으로 되어 있었으니 ''이라 했다. 법률을 국한 혼용에서 한글 전용으로 바꾸면서 ''을 단순히 한글로 ''이라고 했다. 민법 제정 당시에 ''으로 한 것부터 잘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이 국어 문장 속에서 단어로서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률을 한글 전용으로 하면서 단순히 한글로만 바꾸니 ''이 되었는데 ''은 국어에서 단어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국어사전에 ''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명사」

「1」 한문 투에서, ‘사람’을 이르는 말.  

인의 바다.

인의 장막.

「2」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사람을 세는 단위. 한자어 수와 함께 쓴다.  

오 인의 가족.


즉 ''이 '한문 투'에서 쓰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문은 국어가 아니다. 실제로 ''은 '인의 장막' 같은 상투어구에서나 남아 있을 뿐 국어 문장 속에서 '사람'을 뜻하는 말로 ''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민법에서도 제2장의 제목에서만 ''이 딱 한 번 쓰였을 뿐 제목 아닌 조문에서는 ''이 아니라 모두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아래에서 보는 민법 제3조, 제4조를 비롯해 '사람'은 민법에 숱하게 쓰이고 있지만 ''이라고 한 사례는 없다. 


제3조(권리능력의 존속기간)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제4조(성년) 사람은 19세로 성년에 이르게 된다.


''을 쓰지 않는 것은 국어에서 ''은 단어로서 쓰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법 제2장의 제목은 마땅히 '사람'이어야지 ''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 제3장의 제목이 '법인'이므로 제2장의 제목이 ''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법인'과 구별되는 말은 오히려 '자연인'이지 ''이 아니다. '자연인'은 법률용어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말이지만 ''은 법률용어도 아니다. '' 대신 '자연인'을 쓰자는 말이 아니다. '자연인'과 같은 전문용어는 법률을 더욱 국민과 멀어지게 할 뿐이다. ''이 아니라 '사람'을 써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느껴지는 민법인데 ''과 같은 단어 사용은 민법을 일반 국민에게 더욱 어렵게 느껴지게 한다. 





민법 제1편 제2장의 제목 ''은 마땅히 '사람'으로 바꾸어야 한다. 정작 조문에서는 ''이 아니라 '사람'이라 하면서 제목에만 ''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람들이 쓰지 않는 말을 제목에 써서는 안 된다. 이제 민법 제230조를 보자.


제230조(의 설치, 이용권) ①수류지의 소유자가 을 설치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그 을 대안에 접촉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한 손해를 보상하여야 한다.

②대안의 소유자는 수류지의 일부가 자기소유인 때에는 그 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익을 받는 비율로 의 설치, 보존의 비용을 분담하여야 한다.


''이나 '수류지'는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무슨 뜻인지 '수류지'가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알 수 없다. 그럼 왜 이렇게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 민법에 쓰이게 되었을까. 부끄럽게도 답은 일본 민법과 비교해 보면 찾아진다. 일본 민법 제222조는 아래와 같다. 


第二百二十二条 水流地の所有者は、せきを設ける必要がある場合には、対岸の土地が他人の所有に属するときであっても、そのを対岸に付着させて設けることができる。ただし、これによって生じた損害に対して償金を支払わなければならない。

2 対岸の土地の所有者は、水流地の一部がその所有に属するときは、前項のを使用することができる。


거의 그대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수류지', ''은 일본 민법 제222조의 '水流地', ''을 다만 한글로 옮겼을 뿐이다. 일본어에서는 '水流地'와 ''이 단어로서 존재하고 따라서 일본의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만 국어에서는 '수류지'와 ''이 단어가 아니다. 민법 제230조는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일본 민법을 베낀 결과이다. 일본어 '水流地'는 일본어 사전에 '水流が通る地面。河床'로 뜻풀이되어 있다. '물이 흐르는 지면'이라는 뜻이다. 일본 민법의 내용이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면 적어도 말은 우리말을 써야 한다. '수류지'라는 단어가 국어에 없으니 '물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은 ''이라는 국어 단어가 엄연히 있으니 이로 대체해야 함은 물론이다.


제230조(의 설치, 이용권) ①물이 흐르는 땅의 소유자가 을 설치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그 을 대안에 접촉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한 손해를 보상하여야 한다.

②대안의 소유자는 물이 흐르는 땅의 일부가 자기소유인 때에는 그 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익을 받는 비율로 의 설치, 보존의 비용을 분담하여야 한다.


광복 75년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국민 생활을 지배하는 민법에 일본어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부끄럽다. 하루 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 민법 제209조 제2항에서도 낯선 단어가 나타난다.


제209조(자력구제) ①점유자는 그 점유를 부정히 침탈 또는 방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자력으로써 이를 방위할 수 있다.

점유물이 침탈되었을 경우에 부동산일 때에는 점유자는 침탈후 직시 가해자를 배제하여 이를 탈환할 수 있고 동산일 때에는 점유자는 현장에서 또는 추적하여 가해자로부터 이를 탈환할 수 있다.


'점유물이 침탈되었을 경우에 부동산일 때에는 점유자는 침탈후 직시 가해자를 배제하여 이를 탈환할 수 있고'라고 했다. '직시'가 눈길을 끈다. 낯선 말이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직시'를 찾아보지만 국어사전에 없다. 문맥으로 볼 때 '즉시'라고 써야 할 것을 잘못 썼다고밖에 볼 수 없다. '직시'는 민법에서 제209조 제2항에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이에 반해 '즉시'는 아래에 보이는 민법 제249조를 비롯하여 여러 조항에서 사용되고 있다. '직시'를 直時라고 하며 '즉시'와 같은 뜻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억지일 뿐이다. 일반 국민이 쓰지 않고 일반 국민이 모르는 말을 법에 써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국민이 법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직시'는 '즉시'로 바꾸어야 한다.


제249조(선의취득) 평온, 공연하게 동산을 양수한 자가 선의이며 과실없이 그 동산을 점유한 경우에는 양도인이 정당한 소유자가 아닌 때에도 즉시 그 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한다.




법률에 전문용어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법률을 일반인이 쉽게 읽어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법률에는 전문용어만 있는 게 아니다. 전혀 전문용어가 아닌 말도 많이 쓰인다. 쓰일 수밖에 없다. 전문용어가 아니라면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민법에는 전문용어도 아니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말이 쓰이고 있어 읽는 이를 놀라게 한다.


제574조(수량부족, 일부멸실의 경우와 매도인의 담보책임) 전2조의 규정은 수량을 지정한 매매의 목적물이 부족되 경우와 매매목적물의 일부가 계약당시에 이미 멸실된 경우에 매수인이 그 부족 또는 멸실을 알지 못한 때에 준용한다.


제574조에 '매매의 목적물이 부족되는 경우'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데 '부족되는'이 그런 예다. '부족되다'는 국어에 없는 말이다. 국어사전에 없음은 물론 사람들이 쓰지 않는다. 이런 낯설고 생소한 말을 왜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부족되는'은 마땅히 '부족한' 또는 '부족하게 된'으로 바꾸어야 한다. 국어에는 '부족하다'가 있을 뿐 '부족되다'라는 말은 없다.


제574조(수량부족, 일부멸실의 경우와 매도인의 담보책임) 전2조의 규정은 수량을 지정한 매매의 목적물이 부족한 경우와 매매목적물의 일부가 계약당시에 이미 멸실된 경우에 매수인이 그 부족 또는 멸실을 알지 못한 때에 준용한다.


'부족되다'와 같이 전문용어가 아니면서 낯설고 생소한 말은 법률을 더욱 어렵게 느껴지게 한다. 민법 제148조와 제149조에 나오는 '미정한' 역시 전문용어도 아니면서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제148조(조건부권리의 침해금지) 조건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부가 미정한 동안에 조건의 성취로 인하여 생길 상대방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


제149조(조건부권리의 처분 등) 조건의 성취가 미정한 권리의무는 일반규정에 의하여 처분, 상속, 보존 또는 담보로 할 수 있다.


제148조와 제149조에서 각각 '조건의 성부가 미정한', '조건의 성취가 미정한'이라고 했는데 '미정하다'는 형용사가 아니다. '~을 아직 정하지 못하다'라는 뜻의 타동사이다. 사전에만 올라 있을 뿐 실제로 타동사로 잘 쓰이는 말도 아니다. 어떻든 타동사를 마치 형용사인 것처럼 썼는데 '미정하다'는 형용사가 아니므로 '조건의 성부가 미정한', '조건의 성취가 미정한'은 비문법적이다. '미정한'이 아니라 '결정되지 않은' 또는 '정해지지 않은'이라고 풀어서 써야 문법에 맞는다. 


제148조(조건부권리의 침해금지) 조건있는 법률행위의 당사자는 조건의 성부가 결정되지 않은 동안에 조건의 성취로 인하여 생길 상대방의 이익을 해하지 못한다.


제149조(조건부권리의 처분 등) 조건의 성취가 결정되지 않은 권리의무는 일반규정에 의하여 처분, 상속, 보존 또는 담보로 할 수 있다.


전문용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문용어가 아닌 경우도 있다. 민법 제712조를 보자.


제712조(조합원에 대한 채권자의 권리행사) 조합채권자는 그 채권발생 당시에 조합원의 손실부담의 비율을 알지 못한 때에는 각 조합원에게 균분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조합채권자'라고 했는데 언뜻 전문용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합채권자'라는 전문용어가 있는 게 아니다. '조합에 대하여 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조합채권자'라고 표현한 것인데 그런 뜻이라면 '조합의 채권자'라야지 '조합채권자'일 수는 없다. 민법 제715조가 바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715조(조합채무자의 상계의 금지) 조합 채무자는 그 채무와 조합원에 대한 채권으로 상계하지 못한다.


민법 제715조에서는 '조합 채무자'라고 했다. 민법 제712조와 같이 표현한다면 제715조에서도 '조합채무자'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조합 채무자'라고 했다. '조합 채무자'라고 해야 조합에 채무를 지고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금세 이해된다. '조합채무자'는 조합인 채무자, 즉 채무자가 조합이란 뜻으로 이해되기 쉽다. '조합채권자'도 마찬가지다. 조합인 채권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의도하는 뜻은 그 반대다. 조합에 대해 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채권자는 조합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아래처럼 '조합의 채권자'라고 표현해야 옳다. 


제712조(조합원에 대한 채권자의 권리행사) 조합 채권자는 그 채권발생 당시에 조합원의 손실부담의 비율을 알지 못한 때에는 각 조합원에게 균분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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