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자전거 여행 (2020. 12. 5.)
겨울 들어 코로나는 더욱 극성을 부리고 급기야 서울은 밤 9시 이후 막을 내린다는 말까지 나왔다. 심히 우울한 일이었다.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는 압력이 느껴졌다. 마음이 몹시 위축되는 것 같아 안 되겠다 싶어 하루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아끼는 애마인 16인치 접는 자전거를 들고 집을 나섰다. 강남의 센트럴터미널로 가서 홍성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당일치기 여행에 나섰다.
8시 50분에 강남 센트럴터미널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1시간 55분 뒤인 10시 45분에 홍성종합터미널에 나를 내려다놓았다. 이미 대부분의 승객들은 홍성 조금 못 미쳐 내포에서 내린 뒤였다. 홍성엔 6~7년 전에 친구와 자전거 타고 와본 적이 있지만 오래 전 일이라 옛날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 와본 곳 같았다.
오늘 하루 자전거를 타고 돌 코스는 홍성읍을 출발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려 해미면의 해미읍성을 보고 한서대학교 앞을 지나 고개 너머 덕산면으로 갔다가 충남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를 거쳐 홍성으로 돌아오는 걸로 잡았다. 홍성에 돌아오면 저녁이 될 것이고 돌아올 땐 기차를 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차역도 알아두고 열차 시간도 알아둘 겸 홍성종합터미널에서 홍성역으로 향했다. 홍성역은 터미널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홍성역의 모습은 웅장한 기와집 건물이었다. 완만한 언덕을 올라 홍성역에 이르렀다. 역 안에 들어가 시간표를 보고 저녁 7시 14분 기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있는 5시 차는 도저히 타기 어렵다 싶었으므로. 창구에는 기차표를 사러 온 동남아 출신인 듯싶은 외국인이 약간 외국인티가 나는 억양이었지만 자신 있게 표를 사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오래되었나 보다.
역 앞 광장에 붙은 홍성관광안내도와 시내 관광지도를 훑어 보았다. 홍성읍내에 볼거리가 꽤 많았다. 대표적인 곳은 홍주성이었다. 홍성에서도 천주교도들은 조선 후기에 꽤나 박해를 받았던 모양이다. 순교터가 남아 있고 그래서 순례코스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전거여행을 시작한다. 시내로 들어간다.
홍성역에서 시내 방향으로 줄기차게 직진해서 달리니 장군상오거리에 이르렀다. 오거리에 김좌진장군 동상이 서 있다. 보통 위인의 동상은 곧추 서 있는 모습이 보통인데 김좌진 장군 동상은 아주 달랐다. 약간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세운 채로 팔을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 홍성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1920년 10월 장군이 이끄는 군대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매복 작전의 승리였다. 당시 홍범도, 이범석 등이 전투에 함께 참여했다. 이범석은 겨우 20세에 불과했고 홍범도 장군은 50이 넘었다. 김좌진 장군은 31세의 한창 나이... 장군은 불과 10년 뒤에 41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너무 일찍 죽었다. 그의 아들이 김두한이고 김두한의 딸이 김을동, 김을동의 아들이 송일국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홍성읍 한복판에 조양문(朝陽門)이 있었다. 조양문 하니 북경이 생각난다. 그곳에도 조양문이 있으니 말이다. 조양문에서 왼쪽으로 꼬부라져 얼마 안 가서 홍주성이 나타났다. 홍주성은 커다란 공원이었다. 예전에 이곳에 관청이 있었고 감옥이 있었다. 감옥 앞은 천주교 신자의 순교터이기도 했다. 순교터 앞에 샘물이 솟아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수그려 물을 마셨다.
홍성(洪城)은 원래 이름이 홍주(洪州)였다. 홍주가 홍성으로 바뀐 건 1914년이라고 한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1914년에 행정 구역 개편을 하면서 많은 지명을 바꾸었다. 그때 홍주가 홍성이 됐다. 이제 홍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너무 늦었을까. 하지만 홍성 읍내 한복판에 있는 역사공원 이름에는 홍주가 남아 있다. 이곳은 홍주성이니까. 그뿐이 아니다. 문화회관의 이름도 홍성문화회관이 아니라 홍주문화회관이다.
얕은 언덕길을 올라 홍주성의 남문인 홍화문에 이르렀다. 홍화문 밖으로 나오니 홍성읍내가 내려다 보였다. 멀리 홍성온천이 있었다. 홍주성 안에 예전에 관아가 있었을 텐데 지금 홍성군청이 홍주성 바로 앞에 있다.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간다. 홍주성역사관 앞을 지나 홍주성을 벗어났다. 점심 먹을 곳을 찾아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마땅한 데를 쉽사리 찾지 못했다. 결국 들어간 곳은 홍성상설시장 안의 한 국밥집이었다. 장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고 소머리국밥을 주문해서 한 그릇 깨끗이 비웠다.
홍성온천 앞을 지나 홍성우체국을 거쳐 옥암2교차로에 이르니 웅장한 조형물이 서 있었고 홍주천년기념탑이라 씌어 있었다. 이 네거리의 한쪽 모퉁이에 홍주문화회관이 있다. 좌회전하면 보령, 우회전하면 예산이라 씌어 있었지만 직진하면 어느 방향인지는 붙어 있지 않았다. 서산 방향이라는 표지가 없었다. 스마트폰의 지도를 꺼내 보고 직진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저 멀리 산 아래에 도로가 나 있었고 차들이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그 도로는 보령, 광천에서 오는 23번 국도였다.
이제 홍성읍내는 완전히 벗어났고 한적한 국도를 달린다. 한적하다지만 고속도로에 가까운 넓은 길이라 차들이 맹렬히 달리고 그래서 갓길로 조심해서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항면 황곡리를 지나고 어느새 갈산면으로 접어들었다. 갈산면에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다. 국도에서 꽤 떨어져 있기에 그냥 지나치지만...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상촌교차로도 통과해서 23번 국도를 계속 달렸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터널이 있었다. 임해터널이었다. 그리 길어 보이지는 않았다. 얼마 더 지나니 옹기마을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다. 갈산에서 해미로 가는 길은 대체로 평탄했다. 오르기 버거운 가파른 언덕은 없었다. 완만한 언덕이 두 군데 있을 뿐이었다. 홍성군 갈산면이 끝나고 서산시 고북면이 나타났다. 길은 더욱 평탄해졌다. 도로는 한껏 넓어졌고 차량은 드물게 달릴 뿐이어서 편안하게 달릴 수 있었다. 해미가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미교차로에서 국도는 왼쪽으로 꺾였고 서산으로 가는 차들은 좌회전해야 했다. 나는 해미 시내로 갈 참이었으므로 교차로에서 직진했다. 해미교를 건너니 갑자기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 음식점과 카페 간판이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어느새 해미읍성이 나타났다. 읍성의 남문인 진남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미읍성은 홍성에서 본 좀 어수선했던 홍주성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더 넓었고 깔끔하게 잘 단장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초가집이 있어서 마치 민속촌에 온 느낌이었다. 이렇게 넓은 잔디밭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서서히 걸음을 북쪽으로 향했다. 우람한 건물의 동헌에 이르르니 돌계단이 있기에 계단을 올라가보았다. 언덕 위에 청허정(淸虛亭)이 있었고 울창한 소나무숲이 그곳에 있었다. 볼것이 많았고 사진 찍고 싶은 장면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동헌 옆 객사 앞의 소나무는 참 묘하게도 생겼다.
해미읍성은 낙안읍성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읍성이란다. 조선 태종 때 쌓기 시작해 세종 3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벌써 6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해미는 천주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1790년부터 1890년까지 약 100년 동안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에 붙잡혀 와 처형당했다고 하니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이곳에 깃들어 있다. 지금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곳에...
해미읍성을 나왔다. 곳곳에 있는 카페는 손님이 가게 안에서 차를 마시는 것 같았다. 서울과 달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그리 엄격하지 않아 보였다. 해미면을 서서히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렸다. 이제 한티고개 방향으로 간다. 덕산 방향으로 향한다. 서서히 언덕이 시작되었다. 비록 아주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오른편으로 드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산수저수지였다. 그곳을 지나니 내리막이었고 한서대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볼까 했지만 언덕이어서 포기하고 조금 가다가 되돌아나왔다. 이제 점점 산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언덕이 제법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고 긴 언덕을 꾸준히 페달 밟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꼭대기에 이르렀다. 이제 더 오르지 않아도 된다. 해미터널과 덕산터널을 지났다. 다행히 터널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전거로 여행할 때 가장 두려운 곳이 터널이다. 차들이 지날 때 나는 요란한 굉음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트럭이 지날 때야 그러려니 하지만 작은 승용차도 트럭 못지 않은 엄청난 소음을 일으키며 지나니 말이다. 두 개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기나긴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이제야 마음이 여간 여유롭지 않다. 그저 핸들을 꼭 붙잡고 있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터널을 빠져나와 고개를 내려오면서 서산시에서 예산군으로 바뀌었다. 온천으로 유명한 덕산면이다. 시량초등학교 앞을 지나 회전교차로인 시량교차로에서 직진했다.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윤봉길의사생가 사이를 지났다. 왼쪽에는 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충의사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덕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24세 때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거사했다. 그가 투척한 폭탄으로 일본군 대장이 죽었고 의거는 세계에 알려졌다. 그 석 달 전에는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거사에 실패했다. 1932년에 일어난 두 의거에서 이봉창 의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윤봉길 의사는 성공했다. 두 의사는 모두 그 해를 넘기기 전에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덕산온천지구를 통과했다. 왼편에 더 많은 온천이 있다. 높은 건물의 콘도미니엄이 보였다. 도로 오른쪽으로도 온천지구가 있었다. 온천지구 입구에 '덕산온천'이라는 글씨의 금속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온천지구를 지나니 덕산면 거리가 나타났다. 네거리에서 우회전해 덕산성당 앞을 지나 줄곧 내포신도시를 향해 달렸다. 세심천온천호텔 앞을 지나 홍성 방향 609번 지방도로에 올라섰다. 말이 지방도로지 여간 넓지 않다. 도로에는 자전거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어 안전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이제 충남도청이 있는 내포신도시에 접어들었다.
자로 잰 듯이 구획된 깔끔한 신도시가 나타났다. 왼편에 내포신도시고속.시외버스정류소라는 간이 건물이 서 있었고 그곳은 바로 충남도청 앞이었다. 내 눈길을 끈 곳은 도로 오른편에 펼쳐진 공원이었다. 홍예공원이었다. 홍예굥원은 수암산과 용봉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대단히 넓은 공원이었다. 건물은 거의 없었고 오로지 멋진 디자인의 근사한 충남도서관이 있을 뿐이었다. 홍예공원을 걸어서 다 둘러보자면 한두 시간으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홍예공원을 지나 홍성을 향했다. 긴 내리막이 시작되었고 내리막이 끝나니 오르막이었다. 어둠이 깊어진 뒤였고 차츰 홍성읍이 가까워졌다. 덕산통사거리에 이르러 좌회전했고 천주교홍주성지에서 우회전해서 얼마간 달리니 낮에 보았던 장군상오거리였다. 그곳에서 좌회전해 홍성역에 닿으니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난 저녁 6시였다. 7시간 동안 62km를 달려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홍주성을 둘러보고 식당에서 점심 먹고 또 해미읍성에서 구경한 것 등을 빼면 시간당 12km 정도를 달린 듯싶다.
홍성읍을 출발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려 서산 해미읍성과 예산 덕산온천을 지나 홍성으로 돌아온 하루 자전거여행은 만족스러웠다. 코로나로 모두가 전전긍긍하는데 과감히 서울을 벗어나 한적한 충남 내륙에서 자연도 즐기고 역사와 문화 유적을 훑어보았다. 충남도청이 들어선 신도시도 눈에 담았다.
새삼 충청남도가 역사 유적이 그득한 곳임을 실감했다. 홍성, 서산 곳곳에 가톨릭 수난사가 있었다. 독립운동에 목숨 바친 많은 열사들이 그곳에서 태어났다. 만해 한용운의 고향도 홍성이요 화가 고암 이응노 선생도 같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의 최영 장군, 조선 초기의 성삼문 등도 홍성 사람이라니 홍성이 배출한 인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만하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기차를 탔다. 홍성역에서 무궁화호에 올라타니 고속버스보다 훨씬 더 넓다. 그리고 KTX보다도 넓다. 고속버스를 탔다면 곳곳에서 막혀 서행해야 했을 텐데 기차니 그런 일이 없다. 버스와 기차를 골라탈 수 있으니 여간 편하지 않다. 열차의 칸과 칸 사이에 접는 자전거를 놓아둘 공간이 있어 자전거를 갖고 타는 데도 문제가 없다. 겨울이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일치기 홍성 나들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음엔 2박 3일 정도의 심층 탐방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돌아왔다. 온천도 하고 수덕사도 들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