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
며칠 전 아침 사무실로 가고 있는 중인데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왔다. 그런데 폰에 뜬 이름은 수년간 통화한 적이 없는 고등학교 동창 K였다. '그가 웬 일이지?' 일단 받고 보았다. 전화한 이유를 듣고 보니 사정이 이해가 갔다. 그는 모 대학 부총장을 올 초까지 지내다 교수 정년과 함께 물러났다 한다. 이제는 몇 시간 강의만 맡고 있다고 했다. 정년 후 5년 동안 더 강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가 전화한 이유는 전자책 출간에 대해 상의하고자 해서였다. 요즈음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전에 자기가 쓴 책이 절판되어 학생들은 책 없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절판된 책을 전자책으로 내고 싶은데 그걸 맡아줄 출판사를 소개받고 싶다고 했다. 종이책을 낼 출판사를 찾기는 어려울 게 뻔하고 전자책은 가능하지 않겠냐 싶었던 거고 내가 전자책 출판을 한다는 걸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있어 그쪽 사정이 밝을 것 같아 전화를 한 것이다.
그에게 책에 도표, 그림이 많으냐 물었다. 왜냐하면 도표, 그림이 없다면 다른 출판사를 소개해 줄 것도 없이 내가 직접 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책에 도표, 그림이 꽤 있다고 했다. 그래서 원고를 좀 보내보라고 하니 그러겠다고 했다. 곧 책의 몇 장이 메일로 왔다. 열어 보니 생각보다 도표, 그림이 꽤 많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는 출판사에 전화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종이책은 안 내고 전자책으로만 낼 수 있는지 검토해봐달라 부탁하니 그러겠다고 했다.
하루이틀 뒤에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해줄 수는 있으나 조건이 실로 황당했다. 저자가 돈을 300만 원 낼 것, 책이 나오더라도 인세는 지불할 수 없음 등등이었다. 돈을 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책이 팔려도 인세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소린가. 날로 먹겠다는 것 아닌가. 보통 출판은 출판비를 출판사가 몽땅 대는 거 아닌가. 그걸 저자가 댐은 물론 책이 판매돼도 인세를 줄 수 없다? 이런 상도의도 있나 싶었다.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니 얼른 딴 데 알아보겠노라 했다. 출판사 소개 건은 이렇게 짧게 끝났다.
그러나 그 일이 내게 자그만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친구의 전자책 출판을 내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전자책의 도표, 그림 처리 때문이었다. 원고가 순수히 텍스트라면 나도 할 수 있다. 도표, 그림이 있으면 다양한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깨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걸 두려워했기 때문에 나는 못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기기에서 깨지지 않게 할 기술이 왜 없겠나. 그런 노하우는 특정 출판사만 가지라는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도표, 그림이 많은 전자책 내기를 두려워했던 건 디지털 기기의 모양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거진 태블릿을 이용하는데 가로가 긴 태블릿이 있는가 하면 세로가 긴 태블릿도 있다. 별의별 기기가 다 있는 세상 아닌가. 그 모든 걸 충족시키기란 쉽지 않다고 지레 겁을 먹었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해보지도 않고 겁을 먹어서야 되겠나 싶었다. 당장 집에 있는 내 갤럭시 태블릿에서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가진 태블릿은 가로가 긴 것이었다. 세로가 긴 태블릿은 내게 없다.
어떻든 친구로부터 받은 전화가 3년 전에 사고선 별로 써먹지 않고 묵혀둔 내 태블릿을 꺼내게 했다. 애초 그 태블릿을 산 주된 이유는 방송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방송을 별로 보지 않았고 오래도록 묵혀 두었던 것이다. 새로 꺼내서 쓰려고 보니 문제는 키보드였다. 방송이나 유튜브만 보고 만다면 키보드 쓸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뭔가 글을 쓰려면 키보드가 필수다. 결국 블루투스 키보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전에 한두 번 산 적이 있었지만 기능이 만족스럽지 않아 버린 아픔이 있다. 새로 사야 했다.
쿠팡에 들어갔다. 무수한 블루투스 키보드가 판매되고 있었다. 적당하다 싶은 걸 하나 골라 구매에 들어갔다. 토요일 아침 주문을 했는데 당장 그날 중으로 배달된다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과연 저녁에 집에 가니 배달이 돼 있었다. 말 그대로 로켓배송이었다. 쿠팡에서 키보드를 구입하면서 옛말이 생각났다. 발품판다는 말 말이다. 이젠 그 말 대신 손가락품을 판다. 검색을 해서 제품을 고르니 말이다. 80년대, 90년대 그 흥청거리던 용산전자상가가 지금 아주 썰렁해진 건 당연하다. 왜 굳이 매장에까지 가나. 가봐야 물건도 몇 가지 없다.
포장을 뜯고 페어링을 시작했다. 세 기기까지 연결할 수 있다고 했다. 두 기기에 연결이 필요했다. 하나는 갤럭시탭이고 하나는 스마트폰이다. 이번에 구입한 블루투스 키보드는 페어링 과정이 살짝 복잡했다. 자동으로 기기가 뜨지 않았다. 키보드에다 지정된 명령어를 입력해주어야 했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말이다. 어떻든 그 과정을 거치니 갤럭시탭에도 등록이 되었고 스마트폰에도 등록이 되었다.
사용해 보았다. 처음에는 자판이 작아서 좀 애를 먹었다. 그러나 차차 적응이 돼 갔다. 다만 한글 모음 'ㅠ'의 위치가 애매했다. 컴퓨터 자판에서는 'ㅠ'를 왼손으로 쳐 왔다. 그런데 이 블루투스 키보드에서는 왼손보다는 오른손이 더 가깝다. 그게 하나 좀 신경이 쓰였을 뿐 다른 불편은 없었다. 자판 작은 거야 점점 익숙해질 것이고...
오래 소식 없이 지냈던 친구로부터 온 전화가 묵혀두었던 태블릿을 꺼내게 만들었고 거기 맞는 무선 키보드도 장만하게 해주었다. 그가 어떤 출판사를 만나 자신의 책을 전자책으로 내게 될지는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기계는 묵혀 두면 의미 없다. 사용할 때 비로소 가치를 발한다. 처박아 두었던 태블릿을 다시 쓰게 만든 그에게 감사한다. 마침 마음에 드는 키보드까지 구입해서 여간 들뜨지 않는데 문제는 눈이 자꾸 침침하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그러려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