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게 정답일까?
'꿈'은 필독 독서?
중학생 때 독서광이었던 단짝 친구를 따라 우연히 도서부를 구경 갔다 얼떨결에 3년간 활동을 했었다.
도서관은 아지트이자 지겨운 학교 생활에 도피처 같은 곳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기에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 덕에 자연스레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됐다.
게다가 책 관리, 도서 대여 일을 하며 새로 들어온 재밌는 책을 몰래 빼뒀다가 가장 빠르게 읽을 수 있는
특권까지 누렸으니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중학생이 읽어야 하는 필독 도서 100권>와 같은 추천 도서 목록을 게시판에 붙이곤 했다.
목록엔 언제나 고전을 비롯한 자기 개발서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성공 신화 책들은 어린 나에게 '꿈'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딱 좋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성공한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희망고문
나는 소위 '꿈' 맹신론자였다. "20대가 되면, 30대가 되면 00이 되어있어야지."
아주 약간의 흥미와 작은 재능만 있으면 '꿈'에 대입했는데 10대 때는 여행과 글쓰기를 좋아했기에
[여행작가]가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다.
그래도 '여행작가'가 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꿈 이야기에 유일하게 진심으로 믿고 밀어준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매일 여러 신문사의 짤막한 평론글들을 4~5개씩 오려 파일에 모아주셨다.
글쓰기를 연습하겠단 마음으로 그녀가 정성스럽게 스크랩한 신문 조각 아래 의견을 적는 짓을 1년 넘게 했다.
어느 날 야자 시간에 자습서 대신 글을 쓰고 있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담임 선생님은
"인 서울 못하는 것들은 그 시간에 딴짓 말고 공부나 해! 쯧"
그 말에 열이 받아 때려치웠지만 실은 그때 난 이미 알고 있었다. 나에게 글솜씨가 없다는 것을..
어중간한 아이
성인이 된 후로도 NGO 국제활동가와 같은 <꿈 찾기 여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진로가 명확하지 않은 건 삶의 목표가 없는 것처럼도 느끼기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꿈의 입구까지는 가려고 했고 입구 근처까지는 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왜 좋아하는지, 내가 진짜 잘하는 일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늘 따라다녔다.
음.. 좋아하는 마음도, 잘하는 것도 어중간했기 때문이었을까?
'못하는 일' 투성이로 느껴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꿈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처음 접하는 실무는 어렵고 낯설 수밖에 없고 잘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못하는 건 노력하면 점차 나아지기 마련이다.
정작 문제는 그토록 원해서 들어갔건만 어째서인지 그 일들이 도저히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궁금한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사라졌기에 갈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꿈이 없는데.. 어쩌지?
일의 중요도나 강도와는 상관없이 낯선 분야를 접할 땐 늘 긴장되고 두려움이 많은 타입이다.
몇 년 전 창업한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 [의료 관련 회사]에서 단기알바를 한 적이 있었다.
의사를 대상으로 하는 영업 팀의 자료조사 및 정리를 맡았기에 일은 단순하다고 했다.
"하루, 이틀이면 바로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모르는 건 그때그때 물어보고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평소 병원 헤이터로서 의학 용어는 물론이고 어떤 과가 존재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주제에
제대로 된 자료를 찾을 수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비록 알바지만, 기본적인 의학 지식습득이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좋은 팀장님을 만나 속성 과외(?)도 받고 출퇴근 길, 쉬는 시간엔 틈틈이 수첩에 적어둔
내용들을 공부하고 외웠다. 평소라면 절대 들여다보지 않을 의학 관련 서적도 읽었더랬다.
당시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동료가 알바인데 뭘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물었다.
그때 내 대답은 "일을 편안한 마음으로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너무 좋다. " 였던 것 같다.
몇 개월 뒤 팀장님은 "이렇게 일을 잘하는 알바생은 처음 본다"며 파트너 제안을 하셨다.
사실 난 그때 일을 특별히 잘하지 않았다. 다만 모르니까 더 시간과 정성을 기울였을 뿐이다.
잘하려고 하는 마음
처음 볼링을 칠 때 점수가 50점대로 초보자다운 허접한 점수가 나온다.
그러나 바닥의 점을 따라 일정한 힘과 방향으로 공을 던지면 나중엔 점수가 100점까지 오른다.
한때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그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잘하고자 했던 시간들이 쌓여 '잘하는 일'이 되어있었던 것인데 그걸 몰랐다.
어릴 적 엄마가 손으로 하나하나 오려준 신문 조각들처럼 난 미련하고 느리게 모든 일에 공을 들인다.
그래서 오래 걸리고 에너지 소모도 크다.
그게 싫었고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오래 공을 들인 것들에 애정이 담기고 좋아하는 일이 돼버렸다.
좋아해 볼 가능성이 1%라도 있는 일이라면 들여다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꿈 타령만 주구장창 하던 20대에서 끊임없는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30대가 되니, 조금은 철이 드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