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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Nov 16. 2019

밀물, 썰물

1909

신환이 온다고 하는 것은 사실 그리 반길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심하게 아픈 것이고 그래서 중환자실의 문을 어렵게 두드리는 것일 테다. 중환자실 의료진들도 마찬가지의 심정이다. 이번엔 또 누군가가 무슨 특이점을 갖고 어떠한 치료 계획을 살포시 가진 채 3층으로 입실하는 것일까. 손은 손인데 그리 기쁘게 맞이할 수 없는 손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곳은 늘 만실이다. 별로 즐겁지 않은 만실. 


오늘도 온다고 한다. 환자는 벤틸레이터가 필요하고 중심정맥관은 없다는 소문이다. 유치도뇨관은 있는데 비위관은 없고 동시에 환자의 의식도 없는 것 같다고 담당 간호사가 병동에서 인계를 받은 후 굉장히 건조하게 말해주었다. 사실 모두 알고 있다. 저토록 건조한 목소리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필요하다는 것을. 환자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제대로 파악이 된다. 거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상황을 마주해야 차분하게 일이 진행된다. 병동에서는 언제 받을 수 있는지, MAT도 오며 가며 환자에 대한 경고 아닌 경고를 풍문처럼 흘린다. 귀가 쫑긋하는 와중에 다른 환자가 나를 찾는다. 일단은 집중을 하면서 그 포인트를 신환까지 약간 나누어 가야 한다. 말도 안 되지만 살짝 뱉으면서 씹는 느낌으로. 중환자실의 신환이라는 것이 이렇게 쉴 새 없는 쪼임의 연속이라 자신을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무른 찰흙처럼 쉬이 어그러지고 뭉개진다. 그렇게 되면 환자도, 보호자도, 담당 의사도, 그 날의 듀티도 모두 망가진다.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같은 것.


온다. 온다. 드르륵, 침대 끄는 소리가 들리고 입구가 어수선하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눈 앞에 있는 것 같다. 시끄럽지는 않은 것 같으니 아마도 내려오는 동안 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담당 간호사는 다른 환자가 세 번 정도 불러내어 중간에 조금 방해를 받긴 했지만 환자 파악도 어느 정도 되었고 일단은 신환 세팅을 완벽히 해놓은 모양이었다. 차라락. 다시 한번 침대를 미는 소리가 들린다. 환자 분 오셨습니다!


착, 휘이익, 꼭. 이 소리는 신환을 다 같이 받고자 하는 주변 간호사들의 가운을 입는 소리이다. 다시는 풀지 않을 매듭처럼 가운 뒤를 꼭 동여맨 간호사들이 커다란 달처럼 다가오는 환자에게 밀물처럼 밀려든다. 달려든다라는 표현이 적확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신기한 일은 딱히 포지션을 정한 것은 아닌데 자연스레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라인에 집중하고 다른 이는 환자의 인공기도를 보고 있다. 어떤 간호사는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고 저 간호사는 검체를 위한 스왑을 마치 날을 가는 무사처럼 준비 중이며 다른 간호사는 벌써부터 담당의를 부르고 효과적인 보호자 응대를 생각하는 것 같다. 


공간은 한정적이고 신환은 딱 하나다. 구호의 손은 넘쳐서도 모자라서도 아니 된다. 일사불란한 밀물에 제 때 끼어들지 못한 이는 다른 편에서 처방을 잘 짜인 공식처럼 넣고 있다. 나중에 담당 간호사가 특별히 쓰인 물품들만 재입력하면 될 것이다. 그 밖의 간호사는 해당 신환을 맡은 담당 간호사의 다른 환자를 잠시 떠안는다. 별 탈 없으면 담당 간호사가 신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두 시간 정도의 여유만 벌어주면 되는 일이다. 만에 하나 극도로 환자의 컨디션이 저하되는 경우에는 자연스레 그 환자는 모두의 환자가 되어 버린다. 신환도 중요하지만 입실하는 순간 평등한 생명이니까.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니까. 


인공기도와 벤틸레이터가 완벽하게 합체되었다. 환의는 눈부시도록 하얗고 욕창 예방을 위한 측와위가 꽤나 우아하다. 각종 약물들이 투여되는 라인들이 꽉 다문 키조개처럼 이중 고정이 되어 있다. 모니터는 흐르는 와인처럼 환자의 혈압이 물결을 이루고 상단의 그래프는 규칙적이고 아름다운 심박동을 보여준다. 이 때다. 무엇인가 딱 떨어지는 느낌. 더 손을 대면 이것은 넘치는 물컵이다. 더듬이가 명민한 간호사들이 썰물처럼 빠진다. 물기 어린 땅이 드러난다. 검은 자갈도 보이고, 깨진 유리병도 어렴풋 보인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담당 간호사의 영역이다. 당장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담당의와 의견을 나눈다. 곧 다가올 미래에도 살짝 경고를 해둔다. 쌀가루를 켜켜이 뿌리는 것 같은 일이다. 당장에는 티가 나지 않을지언정 시간이 흐르면 단정한 백설기 같은 환자를 만들어낸다. 비록 간호사는 끼니를 거를 수도, 화장실을 못 갈 수도 있겠지만. 


물 흐르듯 환자를 모두 함께 받아낼 때가 있다. 애를 낳아보지도 않았건만 지옥 같은 산고를 거친 임산부의 심정을 조금씩 공유한다. 반기지 않았던 손님이었지만 어쩐지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다가 그 감정 자체를 스스로 부정한다. 아니야. 이런 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그러면서 내일도 모레도 신환을 받는다. 달이 가까워오고 밀물과 썰물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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