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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Dec 24. 2019

나, 그리고 수많은 당신

1912

나는 동관 지하로 내려갔다.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3층 엘리베이터에서 얼굴만 아는 당신을 보았어. 입사 초기엔 눈인사 정도는 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서로 못 본 척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 당신과 나는 졸업한 학교도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인사를 나누기엔 매우 애매한 사이가 되었지. 늘 그랬듯 다시 못 본 척을 하고 서로 각자의 폰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 채로 지하에 당도하였고 당신부터 내렸다. 안녕.
 
또 다른 당신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더니 조금 더 늙고 살이 찐 채로 어느 날 등장했다. 당신의 나이와 타이밍으로 추측하건대 군의관 신분으로 몇 년 군 복무를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중환자실에서 담당의로 만났을 때는 사무적인 말이라도 섞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나를 못 알아볼 가능성도 굉장히 높고, 또 굳이 아는 체를 해서 뭘 어쩌겠는가.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할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당신의 기억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이래저래 업무가 느렸을 텐데 당신은 매 순간 짜증을 내었지. 정말 줄기차게 내는 바람이 나중에는 참 기력도 좋다고 생각했어. 당신은 기억하고 있을까. 웃긴 것은 그때도 지금도 별로 싫은 감정은 없다는 거야.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적당히 나잇살이 찐 배를 내밀며 지금 내 앞에서 식판에 밥을 덜고 있다. 맛있게 먹어요. 짜증은 좀 줄이시고.
 
건너 건너 테이블에도 당신이 있었다. 기숙사에 살 때 맞은편 방을 썼던 당신이었지. 성격이 나쁜 것도, 그렇다고 호인도 아닌 약간 애매한 포지션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어. 다만 뭐랄까. 자만 같은 것이 베이스로 깔려 있는 기질이랄까. 조금만 깊은 대화를 할라 치면 모든 단어에 반감이 서리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지. 그러니까 당신과 나 사이가 슬그머니 닫힌 것은 내가 기숙사에서 빨리 독립했기 때문이 아니야. 방금 눈을 마주쳤다. 슬쩍 웃으며 서로 인사를 했다. 부탁인데 식판을 비우고 이 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거든.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는 김쌈밥을 야무지게 먹을 거다. 너는 내년에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너의 앞길을 응원할 재량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주길 바라. 나도 그럴게. 다만 지금은 다가오지 말아 줘.
 
반쯤 식사를 마쳤을 때 이번엔 다른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 멀끔한 얼굴에 윤이 나는 피부를 가진 당신. 병동에서 일하는 당신과 중환자실 소속인 내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가까워질 기회도 없었고 그렇게 시간이 꽤나 흘렀지. 그러다가 당신과 나 사이의 지인 하나가 술자리를 마련해주어 단박에 친해졌어. 당신은 외모보다 더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병동보다는 중환자실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어. 서로 아쉬워하며 술로 그 마음을 달랬지. 당신이 나를 알아보았다. 힘차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나중에 또 그런 자리가 있겠지. 서로의 자리에서 수고하다가 만나야지. 무지막지한 환자로 엄청나게 피곤한 날 만날 것이다. 그래야 술맛이 나니까. 2019년이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한 해 동안 수고 많았어. 내년에 봅시다.
 
3층으로 다시 올라가는 길에 당신은 내 뒤에 있음이 분명했어. 독특한데 듣기 좋은 목소리는 드물거든. 심지어 카랑카랑하고 발음이 참 좋아. 나와 이름이 비슷한 데다가 내 기억으로는 사번도 한 끝 차이가 날 거야. 당신이 중간이 그만두었다가 다시금 얼굴을 봤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아무 생각 없이 나간 거리에서 동창생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 후로는 얼굴 볼 일이 없었지만 우연찮게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이제와 축하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긴 한데 이 자리를 빌어서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싶네. 왜냐하면 나는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거든. 대놓고 아는 체 하기 애매한 타이밍이었어. 센스가 좋은 당신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거라 생각해. 아무튼 올해 큰 일을 치른 당신, 한 번 더 축하하오.
 
당신은 어디에나 있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당신과 나 사이가 뭔가 달라지지는 않겠지. 다만 올 한 해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어. 나도 당신도. 여러모로 살아내느라 고생했다고 담담하게 덕담 정도는 건넬 수 있을 것 같아. 작년에 올해가 왔듯 이번에도 내년이 오고 있어. 또다시 수고할 나와 당신,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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