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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May 19. 2020

치댐

2005


 가볍다. 아니 무겁다. 마냥 실낱같기도 하면서 두텁다. 감아올린 실타래처럼 차곡차곡 쌓인 관계 같으면서 어느 날 보면 작두로 자른 것 마냥 정확히 절단되어 있다. 그 면을 잘 살펴보면 닳고 닳아 끊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신은 들지 않는다. 날 선 원인을 찾자면 어쩐지 몇 날 며칠을 자학할 것 같아 차마 캐보지 못하겠다. 그랬다. 몇 년 간 당신과 나는 늘 그랬다. 툭 터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 


 사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인지하고 그 공간에 앉아 있어 보려 애를 썼다. 마음 한편 정도는 내줄 수 있음에도 솔직히 흡수되고 싶지는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한 집단 안에서 본능적으로 ‘나’를 잃고 싶지 않은 생존의 문제였으리라. 

 생업에 애써 큰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하얗고 커다란 건물 안에서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진, 얇지만 강력한 계약관계의 병렬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렇지만 직장이라는 곳이 그렇듯 ‘내일부터 안 보련다’ 하는 결심만 하면 당장 그렇게 할 수 있는 관계였다. 사다리 타기처럼 주어진 배정에 뒤이어, 친교를 위해 이곳에서 초록옷을 입고 시간을 쌓고 있던 것은 아니잖아. 어쩌다 보니 모여서 꾸역꾸역 일을 하고 있고, 또 어떻게든 부대끼고 있고. 그러다 보면 의견이 갈리고 그렇지만 또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맞지 않는 옷이라고 사사건건 싸워가며 해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그 위태로운 서사 안에 대단한 패러독스는 내가 혹은 당신이 항상 옳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 누구도 그렇지 않다. 늘 맞고 항상 틀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는 그런 척, 나머지는 못 미덥지만 일단은 따르는 척. 결과론적으로 좋은 것이라면 그건 그렇다 쳐도 과정은 아름답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에 하나를 더한다고 오롯이 둘이 되는 일이 아니니까. 때로는 셋, 오히려 마이너스일 때도 많고, 제곱처럼 뻥 튀겨지는 일도 빈번하다. 우리는 어쩌면 이해는 되는데 공감은 되지 않는 부분이 상상보다 많을지도. 


 그렇게 이가 맞지 않는 도르래에 억지로 윤활유를 쳐가며 굴려야 한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억척스러운 면도 방패처럼 갖추어야 했다. 때로는 시비를 걸어 정해진 답을 듣고야 마는 모진 부분도 있었다. 싸우고, 토라지고, 화해하고, 웃고, 울고. 맙소사, 정이 든다. 거미줄 같은 시간. 끈적거리고 이슬도 맺힌다.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물과 성스러움과 인간다움이 뒤죽박죽 된 이 틈에서 이루어진 이런 관계를 말끔하게 정의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며 동시에 무거운 굴레. 대체 어디까지 의미를 두어야 하는 것인가. 자연스레 잊힐지언정 이제 나는 무 자르듯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시간,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 그리고 당신들을 삶의 일부분이라고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아니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당신. 아직 물들기엔 함께 보낸 시간이 짧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의 당신, 정말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뭐 그건 당신 문제니까. 당신의 방어막이자 출구일 수도 있다. 다만 거기까지인 것이다. 부디 진심이라면 좋겠다. 적어도 나는 솔직하다. 동시에 유약하다.


 나는 당신이 보인다. 어떨 때 당황하는지, 어느 포인트에서 찝찝해하고 포기하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 실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도 알고 있다. 실루엣 같은 방어막이 보인다. 급한 흐름에 에두른 것이 아닌 시대와 상황이 퀴퀴한 천조각 같은 것을 만들어내었다. 그 막을 이해하고 싶다. 당신은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늘 보려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랬건 것처럼. 서로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는 것처럼. 단순한 업무적인 관계 이하로 해야 할까,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같은 선상은 아니다. 꼬리를 자르기엔 켜켜이 채워 놓은 것이 많다. 그것들이 사랑이든 증오든 무관심이든. 오늘도 나는 당신에게 치대고, 당신도 나에게 치댄다. 덩달아 환자도 치댄다. 아아, 나는 도무지 자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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