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래스『오이디푸스왕』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자신의 눈을 팠다. 자신의 죄를 탓하며 그에 걸맞은 벌을 받기 위해 자신을 흙먼지 가득한 까마득한 길 위로 내던졌다. 사람들은 오이디푸스를 손가락질하면서도, 나락으로 떨어져 처참해진 그의 모습을 보면 함부로 수군거리지도 못했다. 그만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행동에 따른 큰 책임을 지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은 오이디푸스의 의지적인 자세는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둘째치고, 그가 과연 그렇게 지나치게 비극적인 벌을 받을 만큼 잘못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아니다’. 나는 오이디푸스가 그렇게까지 고통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오이디푸스의 괴로움의 근본이 모순적이라는 점에 있다.
먼저, 오이디푸스가 괴로워한 근본적인 이유는 ‘살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죽였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과연 라이오스를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인정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자식을 버리고 학대하는 부모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낳았다고 다 부모가 아니다! 저 사람들은 부모로 인정할 수 없다! 아이가 불쌍하다!”. 비록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는 피가 섞여 있지만,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를 키우지 않았다. 오히려 신탁을 듣고 두려움 때문에 버리기까지 했다. 그냥 버린 것도 아니고 도망칠 수 없도록 갓난아이의 발목에 구멍까지 뚫어서 버렸다. 현대인의 관점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학대도 없으며, 이보다 악한 부모가 없을 정도이다. 아마 지금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라이오스는 국가로부터 부모 자격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오이디푸스는 비극이 시작되기 전까지 라이오스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라이오스는 죽을 때조차도 살인자가 친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은 깃털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그냥 남인 셈이다. 라이오스는 아버지의 자격이 없다. 즉,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였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살인을 했다’는 점에서 괴로워할 수 있지만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극심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같은 맥락으로, 이오카스테 또한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결혼해 침상을 나눴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도 된다. 그는 그저 평범하게 한 여인과 결혼을 한 것과 다름없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의지’로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을 행했다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스스로 큰 벌을 내렸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것은 오이디푸스의 의지 때문만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비극적인 ‘신탁’을 받은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에서, 신탁이란 무조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신의 예언이다. 신탁은 인간의 의지로는 피할 수 없다. 신탁을 행하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가 자유의지에 따라 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신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오이디푸스는 그저 자신의 행동은 모두 자신의 자유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는 한낱 인간이기 때문에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를 죽이고 근친을 행하는 것은 의지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탓할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갖고 장난을 치는 신, 혹은 자신에게 기구한 비극을 가져다준 조상(카드모스 가문의 재앙)을 탓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오이디푸스는 오히려 자신을 안타까운 희생양이라 생각하며 작게나마 위로를 해 주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상은 남이었고, 의지는 신의 것이었다. 잘못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잘못하지는 않았다. 괴로운 건 당연하지만 도가 지나쳤으며, 벌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과도했다. 그의 죄목은 ‘길가에서 시비가 붙어 모르는 사람을 죽임’ 정도로만 설명하면 됐다. 세상의 빛을 잃고 주위의 모든 것을 잃는 건 부당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정상참작 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