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모양, 신의 모양

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

by 최지호

“당신의 모습을 알 수 없고 내 주변에서 당신을 찾네. 당신의 존재가 당신의 사랑으로 내 눈을 채우니 그게 날 겸손하게 하네. 당신은 모든 곳에 있단 것이”


신이라는 건 뭘까, 종교라는 건 뭘까. 신으로 인정받는 존재는 왜, 어떻게 신이 되었을까. 신이라고 불리게 되는 덴 단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걸까. 필자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가 어떤 존재가 신이라고 불리게 되는 데 있어 상반되는 두 가지 루트를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방식은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리차드 커니의 분석에 따르면 ‘신’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우리를 ‘무릎 꿇리고 숭배’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다. 이를 더 풀어서 해석해보자면 신은 우리가 본연적으로 가진 힘만으로는 감히 이길 수 없는 능력을 지님에 따라, 그 위압감으로부터 우리의 경외와 존경 어쩌면 두려움의 감정까지 이끌어내는 존재이다. 즉, 신이 되기 위해서는 청중을 압도할 만한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폭력적인 방식이든 방어적인 방식이든 간에 청중 앞에서 과시함으로써 청중이 일종의 ‘무력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스트릭랜드가 괴생명체를 지속해서 부정하다가 영화의 종단에 가서 그를 신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총을 쏴도 죽지 않고, 어마무시한 힘으로 손쉽게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인간으로서 절대 이길 수 없는 능력에 무력함을 느낀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에게 본능적인 두려움과 경외에 괴생명체를 신으로 인정한다.


필자는 이것이 지독하게 힘의 논리에 따른 신의 상정 방식이며, 따라서 이렇게 인정된 신은 그것을 믿는 대중들과 수직적인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신은 ‘괴물’이라는 지위와 한 끗 차이에 있게 될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의 인정 방식에 따라 그 타이틀이 바뀌는 것이다. 또한 힘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끝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신은 그 시기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몰락하게 된다.


두 번째 방식은 ‘사랑’이다. 이는 필자가 글을 열며 인용한 영화의 나래이션과 연결해 설명할 수 있다.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았을 때, 사실 신이라는 존재의 형체가 어떠한지 특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신은 마음속에서부터 우리와 항상 함께하기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그 자체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마음에 품고 세상을 겸손하게 대해야 한다는 깨달음뿐이다. 어딜 가든 함께인 듯하고 무엇을 보든 떠오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사랑(love)’이라고 부른다. 내 사랑(lover)은 나의 세계가 되고, 그 세계의 질서가 되며, 그러므로 애초에 그를 거역하고 싶다는 의지도 없었던 나는, 점차 의지대로도 그를 거역할 수가 없어진다. 거스를 수 없는 나의 세계, 나의 유일한 질서를 종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는 곧 ‘신’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사랑이 만든 자발적 순종, 그로 만들어진 세계의 질서로서의 신. 힘의 논리에 따른 신과 이를 비교했을 때, 원초적으로 '쌍방'을 필요충분조건으로 갖고 있는 사랑의 특성 때문에 이보다 수평적일 수가 없다. 또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왔던 것처럼, 사랑은 그 어떤 수수께끼와 질서, 시공간과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오랫동안 이 세계에 남아있을 수 있다.


필자가 종교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함께하는 여러 신과 종교를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결국 사랑의 모양 곧 신의 모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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