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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지 Aug 30. 2021

일터가 있다는 행복

 내가 적(籍)을 두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과 행복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교사다.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공립학교에 근무하는 교육공무원.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용안정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직종 중 하나이며, '철밥통'이라는 소리를 듣는 직업. 특히나 아이를 키우는 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다고들 하는 직업.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그 해 3월 1일 자로 교직에 첫 발령을 받았으니 사실상 다른 일을 구하는 힘듦을 잘 모를 법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근무하다 결혼을 앞두고 개인적인 사유로 의원면직, 즉 사직을 하게 되었다. 직을 내려놓아도 손에 쥔 교원자격증 한 장이면 기간제를 하면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직을 하고 처음으로 기간제 원서를 낸 학교에는 나 이외에도 여러 명의 지원자들이 있었다. 여름방학까지 포함되어 있는 6개월 기간제 자리라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어린 선생님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다년간 경험을 쌓은 장점이 내 무기였다. 결국 최종 합격을 했고 새로운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규 교원으로 근무할 때와 비교하여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오히려 이전 학교에서 부장으로서 짊어졌던 각종 무거운 업무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행복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잠깐의 행복은 착시에 불과했다.

 6개월의 기간제 근무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난데없이 교무실 호출을 받았다. 별다른 업무도 맡고 있지 않은 터라 의아했지만 큰 생각 없이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교감선생님에게 다가가자, 중년의 여교감은 평소보다 유난히도 날 반기며 살가운 미소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첫마디에 나의 계약조건을 상기시켰다.
 "호지쌤, 기간제 계약기간과 조건 알지? 쌤 자리에 휴직을 냈던 선생님의 휴직 사유가 만료되면 바로 그 쌤이 복직해야 하거든. XXX 선생님이 조금 일찍 복직하게 되어서 호지쌤 근무기간도 조정해야 할 것 같아~."
 천청벽력 같은 소리였다. 6개월의 근무기간이 마음에 들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선택한 학교였다. 게다가 내 자리에 원래 근무하던 선생님은 파견 연수를 간 상태라 학기 중 돌아올 것은 생각도 하고 있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왜 복직하시나요? 저도 당황스럽네요. "
 "글쎄, 아주 경사가 났는데. XXX쌤이 임신을 하셨다고 하네~ 힘들게 둘째를 가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먼 곳에서 연수를 계속 받겠어. 연수 포기하고 복직한다고 하네~ 본인도 이제야 알았대~ 5개월이나 지났다는데 어쩜 그리 몰랐을까~. 둔하기도 하지."
 "언제 복직하시나요?"
 "응~ 7월 22일. 방학식날."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다 크지 못한 나는 속상하고 서러운 마음에 학생처럼 교무실에서 울어버렸다. 내 마음을 지배한 더 큰 감정은 미움이었다. 나는 사실 그 선생님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간제 근무를 시작했을 때, 다른 선생님들이 알려주셨다. 임신 사실을 알고서도 파견 연수를 지원했다는 사실도. 알고 지원했기에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큰 착각이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하필 복직일이 방학식 당일인 것도 비참했다. 한 학기 동안 정을 준 아이들과 마지막 날 인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냥 다 너무 싫어서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 속마음이 내비쳤을까. 교감 선생님은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어쩔 수 없네~ 자기, 교직 사회 좁은 거 알지?"
 그 말이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협박'. 미소를 띠고 우아하게 말하면 협박이 아닌 걸까?
 결국 나는 계속 그 학교에 근무했고, 남들보다 하루 빨리 여름방학을 맞았다. 월급도 소속도 없는 빈 방학이었다. 짐을 싸서 학교를 나오면서 난데없이 엄마 생각이 났다. 단발머리에 물려받은 큰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나의 중학생 시절, 우리 엄마도 이렇게 학교를 떠나온 날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조리사였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급식실의 조리사. 조리와 관련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우신 적도 없지만 여러 식당에서 근무를 하신 경험에 딸이 본교 재학생이라는 점이 추가 점수로 작용을 했는지 새로 생긴 급식실에 일자리를 얻게 되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괜히 창피한 마음이 들어 우리 엄마가 급식실에서 밥을 짓는다는 걸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았다. 하굣길에 급식실에서 나오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는 모른 척 천천히 걷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더니 평소보다 빨리 엄마가 와 계셨다. 엄마는 꿈꾸듯 묘한 표정으로 툇마루에 앉아 계셨다. 한 손에는 붕대가 잔뜩 감겨 있었다. 놀란 내 표정을 보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국수 뽑는 기계 있잖냐. 그걸 씻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엄마 고무장갑이 빨려 들어가는 거 있지. 옆에 있던 선생님이 재빨리 전원을 껐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엄마 손이 다 빨려 들어갈 뻔했어."
 너무나 놀라 심장이 뛰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손가락에 상처만 입고 끝났지만, 아찔한 상황에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엄마는 이렇게 다쳐가며 고생을 하시는데 나는 고작 창피함만을 느꼈다니. 그 창피가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엄마가 다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는 내 자신이 바보 같았다.

 사고가 있은 후에도 엄마는 열심히 급식실에 다녔다. 집에 오면 급식실에서 있었던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시기도 하고,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오는 누구누구 선생이 그 사람 아니냐며 알은체를 하시기도 했다. 일은 고되어도 보람차게 느껴졌다. 본인의 순수한 노동으로 딸들에게 용돈을 건넬 수 있음에 기뻐하시는 게 느껴졌다. 고마운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중학교 졸업을 앞두었고 고입 준비에 바빠졌다. 고등학생이 될 내 모습만 상상했지 우리 가족의 다른 모습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갖지 못했다. 하루는 집에 왔더니 엄마가 유난히 지치고 슬퍼 보였다. 술도 한 잔 하신 것 같았다. 엄마는 씨익 웃으며 말씀하셨다.
 "호지야, 엄마 백수 됐다. 우리 딸이 졸업한다고 나도 그만 다니란다. 이제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더라. "
 어린 딸에겐 생전 듣도보도 못한 퇴사의 이유였다. 그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다 손까지 잃을 뻔한 우리 엄마를 이렇게 내치다니, 분하고 괘씸한 마음에 몹시도 괴로웠다. 더 힘들었던 건 너무나 깊고 진하게 느껴지던 엄마의 상실감이었다. 며칠을 무거워 보이던 엄마는 다시 분식집으로, 중국집으로 일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노래 가사처럼, 엄마는 일에서 겪은 상처를 새로운 일로 치유하시려 분투하는 것 같았다.




 첫 기간제 학교에서 그 일이 있고 몇 년 후, 다시 임용시험에 통과한 나는 새로운 학교에 정규 발령을 받았다. 교육공무원으로 재임용이었다.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을 하면서 돌아올 내 자리가 있음에 가슴 깊은 안도감과 포근함, 그리고 감사함을 느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잃을 뻔한 내 또 다른 자아가 이곳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학에서 4년간 배우고, 현장에서 수년간 익힌 나의 지식과 경험이 의미 있게 빛을 발하는 공간이 있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속 깊은 감사와 함께 해묵은 상처를 달랠 수 있었다. 몇 년 전 겪었던 그 사건도, 우리 엄마가 지나온 수많은 상실의 나날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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