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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파파 Nov 09. 2024

아버지 수술과 엄마의 김밥

때론 연약함이 우리의 인생이다

2023년 12월 4일, 그날을 복기한다. 지나온 일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은 사뭇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기록의 힘을 빌려야 기억의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박제하는 "아버지 수술과 엄마의 김밥”을 소재로 기억을 붙드는 짧은 글. 적어도 살아가면서 날이 서고 비릿한 감정이 들어설 때, 흔치 않은 과거의 기록은 분명 기댈 수 있는 흔적이 된다. 


2023년 10월 중순 경이었다. 엄마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파리한 안색으로 낯빛이 유독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동네 인근 내과에서 피검사를 받았고, 수치가 상징하는 결과는 곧장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소견서로 정리됐다. 본인 스스로 부산 백병원에서 소화기 내과와 혈액종양과에 정밀 검사를 예약했다는 아버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당신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불편한 감정을 실어 날랐고, “뚜우~ 뚜우~” 단번에 끊기는 통화음에 적잖이 당황했다. 곧이어 전신으로 번져오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짜증과 실망감까지, 감정의 채도는 경계를 지울 수 없을 만큼 흐릿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병원에 동행했던 남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다. 아버지 스스로 혈액 수치를 두고 ‘혈액암’이라는 무서운 병명을 읊조리며 자가 진단까지 했다고 한다. 아닌 밤 중 홍두깨라고, 전후사정을 전혀 몰랐던 나로선 '혈액암'이라는 생각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경기도에 터를 잡고 사는 나로선, 장남이라는 서열(?)의 몫을 의식하며 서울 아산병원에 부리나케 가정의학과에 다시 진료를 예약했다. 약 15년 전, 환갑을 갓 넘은 나이에 아산병원에서 위암 전절제 수술을 받은 아버지도 표현은 안 했지만, 지역보다는 서울의 의료 기술에 믿음이 강했다.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암은 아니고, 담낭 결석이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다만 CT 검사는 예약이 꽉 차 본원에서 오래 기다려야 하니, 1, 2차 병원에서 CT를 찍어보라는 말을 남겼다. 황달이 얼굴에 완연한 아버지는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 곧장 지역 병원에 들렀고, 그곳에서 CT를 찍었다. 의사 소견은 담석의 위치와 그에 따른 위험도가 매우 커 조속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니면 패혈증으로 이어져 생명까지 위험질 수 있다는 협박과 함께였다.


부랴부랴 아산병원 간담도췌외과 진료 예약을 다시 진행했고, 천행으로 첫 진료는 빨리 잡혔다. 진료 당일, 긴장된 모습으로 아버지와 난 예약한 진료실을 노크했다. CT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은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당장 12월까지 수술 일정을 잡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CT상으로 본 아버지의 위급한 사정인지, 두 차례에 걸쳐 전화연결을 시도했고 다행히 스케줄이 느슨한 한 의사분과 한 달 후쯤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산병원에 입원해 5일간 각종 검사를 받았고, 퇴원 2주 후인 12월 4일 월요일에 드디어 수술일자를 확정받았다. 


서울 대형병원에서 전국 각지의 수많은 환자가 몰려드느라, 검사 후 바로 수술로 이어지지 않고 한차례 퇴원을 거쳐 수술 일정이 별도로 진행되는 이상한 프로세스는 의료체계의 기형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그만큼 지역에서 상경한 환자들의 불편과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고, 초과 수요에 따른 공급자의 편의적 행정처리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 앞에 무력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다.




담석 제거 수술이 쉽고 간단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버지는 위암수술로 인한 유착이 심해 다시 개복을 해야만 했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수술일. 전날 입원 수속을 밟고, 어머니와 난 보호자 1인 원칙에 따라 교대로 아버지 병실을 지켰다. 그리고 다음날, 수술은 전신마취를 거쳐 순조롭게 진행됐다.


병실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대기 중인데, 갑자기 병원 내선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술 회복실인데 다급하게 호출한 상황.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짧은 찰나에 숱한 생각이 들었다. 뭐가 잘못됐는지, 갖은 걱정에 사로잡혔다. 수술 회복실 3층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치 늪 속으로 빠져드는 듯, 무릎은 꺾이고 또 꺾였다.


아버지는 덩그러니 수술대 베드에 누워 계셨다. 배를 감싼 수술 부위는 하얀색 압박붕대로 둘러싸였고, 핏기 없는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색과 함께 기다랗게 늘어진 콧줄은 힘든 수술을 짐작케 했다. 살며시 눈을 뜨면서도 통증이 너무 심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큰아들을 알아보겠느냐는 나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신은 너무 아파 짜증으로 가득했고, 칼로 쑤시는 듯한 날카로움에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급기야 손으로 콧줄까지 뽑아버리고, 옆을 지키던 의사는 콧줄 삽입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면박을 주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집도한 의사는 수술은 잘 됐다는 말을 나중에야 들었고, 당시 회복실 호출은 섬망 증세 때문에 간간히 연세가 있으신 환자의 보호자들을 불러 말을 시킨다고 했다. 그 순간 다리가 풀렸다. 다행이란 생각에 감사하고 또 고마웠다.  


이틀간 아버지는 극간의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후, 회복은 빠르게 진행됐다. 위 전절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의 강도와 빈도도 확연히 줄었다. 보호자인 엄마와 수시로 연락하면서 아버지의 몸 상태를 물었고, 정상적인 식사까지 가능할 만큼 나아졌다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아침 회진마다 집도한 의사는 10일 후 퇴원할 수 있다고 전했다.


몸이 아파 수술을 받으면 일차적으로 환자가 제일 힘들지만, 간호하고 심부름하는 엄마의 수고도 비견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그 나이에는 백년해로라는 사랑의 힘은 엹어지고 책임과 의무로 다져진 전우애의 느낌이 강했던 터라, 아버지의 병시중으로 인해 엄마의 체력과 인내력은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름의 불만을 토로하는데, 중간에 낀 나로선 일단 당신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대처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한쪽으로 치우치면,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입원 7일 차쯤 집에서 손수 김밥과 과일을 준비한 와이프와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지하 카페테리아에서 손주를 보며 환한 미소로 응대하는 아버지와 엄마. 일요일이라 한산한 인적에, 엄마는 김밥을 오물오물 씹으며 녹초가 된 병원생활의 지난함을 잠시나마 덜어냈다. 서울 대형병원에서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쪽잠을 청하며 갖은 수고로움을 견뎌야 했던 엄마의 시간이 조금이나마 보상되는 듯싶어 다행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주름골은 깊어지고, 희끗희끗 늘어난 머리칼은 윤슬처럼 반짝였다. 긴 시간 반복해 꺼내 입던 남루해진 옷들은 집사람이 서둘러 챙겨 넣었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시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수술 직후 칼로 찌르는 듯한 강렬한 통증에 고통의 민낯과 마주했던 순간. 김밥 몇 개를 집어드시고 목이 메어 물을 찾던 엄마의 늘어지고 갈라진 목소리. 일분일초 담석이 행여 췌장을 막지 않을지 노심초사했던 기다림의 시간들. 어쩌면 평범한 일상을 순식간에 잠식하며, 일상의 균형을 무너뜨린 시간들이었다.


상황과 공간과 사람에 따라 변주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목도하는 일은 어쩌면 더 자주 내 삶을 노크할지 모른다. 하지만 애써, 그리고 억지로 그 순간을 억누르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가까운 사람과 더 자주 표현하고, 더 많이 공감하고, 더 사랑하는 노력만으로 연약함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관계란 그런 것이고, 공존은 그런 토대 속에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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