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것 (2)

이 이야기를 나에게 대입해 보았다.

by 지훈

내가 어렸을 때 무엇하는 것을 좋아했더라?




이럴 때도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가끔은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를 나 자신 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잘 파악하고 있을 때가 있다. 이구동성으로 해 준 이야기는 나는 어렸을 때 만화를 즐겨 그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어렸을 때 만화 그리기를 한 번쯤 안 해본 아이들이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직접 만화의 스토리를 만들고 그 흐름에 따라 각 장면이 연결되는 만화책을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나도 잘 기억 못 하는 부분까지도 그들은 상세하게 기억하여 되새김질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어렴풋하게 과거 속에서 잊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종이에다가 네모 칸막이를 만들고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배치하고,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나의 공상이 펜과 종이를 통해 현실로서 구현되는 순간들인 것이다. 그렇게 만화 그리기에 몰두하던 순간이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무아지경이었던 것 같다. 현실의 잡다한 걱정거리들과 숙제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 내가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상상 저편의 공상 세계에 빠져들던 순간.




그런데 아마도 내 기억에 의하면 그렇게 열심히 만화를 그리다가 중학교 1학년 때인가 만화 그리기를 그만두었던 것 같다. 그때 머리에 자각이 든 것은 이런 것이었다. 이 상태로 이렇게 만화만 그리다가는 대학을 가지 못할 것 같다, 대학을 가지 못하면 제대로 된 곳에 취업을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여, 대학을 가지 않고 계속 만화를 그려서 만화가가 된다고 치자. 그렇다고 만화가가 되어서 생계를 제대로 꾸려갈 수가 있을까. 그때는 지금과 같은 웹툰 작가들이 인정받던 시대는 아니었으니까. 당시에는 이름을 날리던 만화가들도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도 대우받지도 못하고 낮게 평가받던 때였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내가 그들보다 뛰어난 만화가가 될지 확신할 수 없었고. 설혹 이름난 만화가가 된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이 보장이 될지 또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제대로 받을지 미래가 매우 불투명해 보였다. 여러 가지로, 이모저모로 생각해 봐도 상당히 불안정한 미래가 그려졌다. 결국 나는 만화 그리기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한 것이 중학교 1학년 시점이었다. 결심을 한 다음 날, 그동안 쌓아두었던, 내가 직접 만든 만화책들을 모두 모아서 미련 없이 휴지통에 버렸다.




초중학교 수업 시간 이외 과정에서 별도로 그림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작년 여름에 한 달 정도 근처 회화 학원에 등록해서 기초 데생을 배웠다. 한 달 기초 소묘를 배운 것을 가지고 드로잉 교육을 받았다고 내세우기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잘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화실에 놓여있는 수강생들의 인물화 소묘와 수채화, 유화 작품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어르신 얼굴의 머리카락 한 올과 주름살 마디까지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그린 어느 수강생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1년 이상 화실을 다닌다고 해도 이 보다 더 잘 묘사한 인물화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인물을 정말 사실적으로, 마치 바로 눈앞에 살아있는 어르신을 보는 것처럼 잔주름과 피부 질감까지 세심하게 그렸는데. 그런데 그렇게 실물에 현저하게 가깝게 그린다면 차라리 사진을 찍지 왜 그림을 그리는 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더더군다나 유화의 경우는, 시간이 감에 따라 아마도 액자에 넣는 유화작품들이 쌓여갈 것이고 그 액자들을 집 안 어딘가에 보관을 해야 할 텐데, 한없이 늘어나는 크고 작은 액자들을 별도의 보관 창고가 있지 않고서야 나중에 감당할 수가 있으려나 싶었다. 어떤 분들은 그런 것들을 왜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냐고 하는데. 경험상으로 무장적 취미로 시작해서 마련한 장비들이 집안 공간을 마구 점령해 버려 나중에 감당도 관리도 못하고 뒤처리에 끙끙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은 이제 곧 파쇄할 이면지 뒷면에, 샌드위치 브라운 색 포장지 뒷면에 볼펜이나 연필로 끄적이며 선을 그어 본다. 직선, 곡선, 구름, 사람의 윤곽, 만화 캐릭터 등등. 사실 이런 그리기는 작년 화실에 가기 훨씬 이전부터 일상적으로 틈날 때마다 해오던 행위이다.


심심풀이로 또는 머리를 환기시켜야 할 때, 무료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회의 시간에 어느 틈에 나도 모르는 펜으로 여러 모양의 선을 긋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