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독서 경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by 지훈

"AI와 예술"이라는 주제의 포럼이었다. 첫 연사는 2016년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딥마인드의 AI 알파고와의 대결 이후, 전대미문의 충격으로 달라져버린 바둑계 풍경을 세밀하게 다룬 르포르타주 「먼저 온 미래」의 장강명 작가였다. 그는 대뜸 지금은 잃어버린 독서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잃어버린 독서 경험?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작가는 오래전 군복무 시절에,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핸드폰도, 인터넷도, 랩탑이니 개인용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군 병영 내 도서관에서 몇 권 없는 책 중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작가의 「악령」이라는 책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그 지루 지긋하게 시간이 느릿하게 가던 시절의 군 내무반에서, 꽤 오래전 러시아 작가가 쓴 책 두 권을 완독 한다. 그리고 책으로부터 받은 감명으로 인해 무신론자의 길로 걸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것 보다. 당시로는 인터넷이나 컴퓨터, 핸드폰이 없었으므로 책에 쓰인 내용 이외에는 달리 그 책에 대해 또는 그 작가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군대에 있었으므로. 그래서 당시 20대 군인이었던 장 작가는 책을 들척이면서 작가 연보나 소개, 역자의 소개의 글 등을 읽으며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게 된다. 달리 어디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에 나머지는 그 책에서 읽은 내용을 가지고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으로 드문 드문 비어있는 정보들을 채워야 했다.




지금은 내가 읽을 어떤 작가의 책이 정해지면, 그래서 그 작가가 궁금하고, 그 도서가 궁금해지면 바로 디지털 디바이스로 접속하여 검색을 하면 된다. 각종 블로그와 동영상에서 작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고, 책에 대해서도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도 말끔 요약 정리한 글이나 동영상이 여럿 나와있다. 편리함과 편의성 최적의 시대다. 내가 한 권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색에 잠기거나 작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를 상상해 볼 여지가 박탈당했다. 내가 잘못 상상해 보고 오류에 빠질 권리.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다.




나는 대학시절 겨울방학 때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었다. 책을 읽기 전에 언제나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이런 단어들이 주는 발음과 뉘앙스가 뭔지 모르게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책을 읽기 전에 내용이나 줄거리를 전혀 몰랐다. 다만 그런 러시아 작가와 소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세계문학사의 명작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정도. 작가와 소설의 내용조차 잘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라는 낯설지만 뭔가 묵직한, 의미심장한 느낌을 주는 그런 단어들이 오히려 오만가지 상상력과 호기심을 극도로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책을 읽기도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소설에 대해 수십, 수천, 수만 가지의 내 나름의 상상의 나뭇가지들이 뻗쳐 나갔던 것 같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의 생애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야기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당시에 내가 무엇을 상상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실제로「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황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 상상 속에서 내가 만들어낸 허구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들과 이야기와 실제 책 속에서 나타난「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줄거리나 등장인물들 간의 간격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의아해하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라면 이런 상상의 시공간이 부재할 것이다. 바로 클릭 한 두 번 또는 프롬프트 입력만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 대한 연혁, 기록, 독서후기, 유튜버와 블로거 코멘트, 기사 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쉽게 취득되고 범람하는 정보들에 의해 내 머릿속 상상력의 공간, 나 개인이 가졌던 고유의 상상의 시공간이 옹색하게 줄어든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상상의 시공간을 외부 정보, 데이터들이 거대 물량으로 채워버렸다. 물론 달리 보자면 과거의 내가 가졌던 그 상상의 시공간은 제멋대로의 오류 투성이었을 것이다. 내 멋대로의 상상과 공상, 몽상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이었을 테니까. 오류투성이었을 내 머릿속 상상 공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실에 입각한 (혹은 사실에 입각했다고 믿어지는, 그러니까 어쩌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런 정보와 데이터, 설명으로 매일 가득가득 채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