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에서 표현으로
사물을 똑같이 그린 그림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거 아주 사진 같은 그림이구만"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진기는 찍은 사진은 대상을 그대로 재현한다. 아무리 똑같이 그린 그림이라고 할지라도 사진기보다 더 사물을 똑같이 그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존에 현실을 똑같이 그리는 게 목표인 화가들에게 사진기의 발명은 절망적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귀족들의 초상화를 똑같이 그려주고 돈을 받던 화가들은 사진기가 발명된 이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졌다. 메시보다 축구 잘하는 기계와 갑자기 축구 시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고 절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사진기가 세상 누구보다 똑같이 그린다면 해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똑같이 그리지 않으면 된다. 똑같이 그리는 것을 '재현'이라고 한다면 거장들은 재현보다 '본질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주 쉬운 것처럼 들리지만 이렇게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AI가 사람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사람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미술이 단순히 사물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표현한다는 건 철학적인 물음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처럼.
재현과 표현의 차이가 단순한 말장난 같을 수 있지만 엄격히 다르다. 재현이 단순히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을 말한다면 표현은 개인의 감정과 심리를 안에서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 차이가 우리에겐 그다지 커 보이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추상미술, 표현미술을 너무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장 쿠팡에 포스터만 검색해 보아도 고흐부터 달리, 뭉크, 클림트 등 유명한 후기인상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표현미술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다르다. 전에 없던 새로운 만들어내는 보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술을 보았을 때 충격은 2009년 잡스의 아이폰 프레젠테이션을 보았을 때 정도의 충격일까? 아마 더 했을 것이다.
표현의 미술, 그 출발점으로 인상주의 화가를 보자.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실적으로 똑같이 그리는 걸 포기하고 그들의 눈에 비친 빛의 순간적인 모습을 그리려 했다. 클로드 모네는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에서 일출의 순간을 그렸다. 다만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고전미술 시대에 파란색으로만 묘사되던 바다는, 모네의 그림에서는 더 이상 파란색이 아니다. 일출의 순간에 바다는 빛에 의해서 푸른색이 아닌 다른 어떤 색이 된다. 바다를 그린게 아니라 빛을 그린 것이다. 순간의 빛에 의해 받은 인상. 그 인상을 그리는 인상주의.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다.
인상주의 이후의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보다 더 왜곡된 형태, 내면의 감정을 더욱더 표현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가 빛에 집착했다면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 화가들은 각자 자신의 주관에 따라 개성적인 화풍을 고집하게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인 반 고흐의 작품을 보면 모네와 달리 무언가를 더 표현하려 했다는 게 느껴진다.
압생트에 취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며 고흐가 느꼈던 내면의 감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술 취해서 본 낙성대 밤하늘을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모네의 그림과 비교해 본다면 사실적인 묘사는 형태는 더욱더 옅어지고 화가가 느끼는 내면의 감정은 더욱더 짙어진다.
후기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들로네의 작품은 더욱더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점점 더 추상화되기 시작한다. 추상 미술이 화가가 특정 사물을 모습을 생략하고 변형시키거나, 색을 바꾸는 것을 지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 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고 하면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이 빠질 수 없다. 그림이 아니고서야 이런 사물은 볼 수 없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내지 않고, 아예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그리기 시작한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이야기하기 전에 색채의 해방으로 유명한 야수파의 마티스나, 형태의 해방으로 잘 알려진 큐비즘의 피카소를 생략하긴 하였지만 이들 역시도 재현이 아닌 표현 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사진기는 화가들에게 재현을 빼앗아갔지만 덕분에 표현을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거장들이 거장으로 평가받는 것 중 하나는 사진기가 재현 미술에 절망을 선물한 시점에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해내갔기 때문이다. 즉, 전에 없던 것을 만든 것. 칸딘스키나 피카소의 그림을 내가 지금 똑같이 그릴 수 있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전에 없었던 것을 시대정신과 철학을 갖고 새롭게 만들어 나간 것이 대단한 것이다.
이 포스팅을 쓰면서 사진기를 떠올릴 때마다 래퍼 저스디스의 가사가 떠올랐다. "Justhis, 정복하고 구원하지 동시에" 추상주의의 끝판왕, 말레비치의 작품을 끝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