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요?
당연히 붙을 줄 알았던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후, 허탈함이 밀려왔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이 교사가 되어 학교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책을 펴고 앉아 있었습니다.
후배들 사이에 섞여 공부를 이어가는 일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1년 내내 공부하기보다는, 6개월은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경험을 쌓고 남은 기간에 임용 공부를 하는 게 좋다는 조언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며칠 뒤, 영광의 한 작은 학교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일단 가보자” 하셨고, 저도 그 말에 기대어 영광으로 향했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교장선생님은 자신도 광주에 산다고 말씀하시며, “아침에 집 앞으로 올 수 있으면 제가 데리고 다니겠습니다.”라고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불안했던 저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7시, 저는 교장선생님 아파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정장을 입고, 초조한 마음으로 교장선생님이 나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에어컨을 틀지 않으셨고, 국도만 이용하셨습니다.
출근길은 늘 1시간이 넘게 걸렸고, 저는 그 시간 동안 꼿꼿이 앉아 있었습니다.
퇴근도 함께 해야 해서, 조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엔 아버지가 데려다주셨지만, 저녁엔 4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 만난 여덟 명의 아이들은 참 예뻤습니다.
처음으로 교사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만난 순간, “그래,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수업 준비를 열심히 했고, 방과 후엔 지도서를 보며 임용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무렵, 교무부장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긴장한 마음으로 찾아갔더니, 의외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교장선생님 차로 출퇴근을 하니, 기름값 명목으로 30만 원 정도 드리는 게 좋겠네.”
180만 원의 월급에서 30만 원이라니,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괜히 문제 만들지 말고, 그냥 드려라” 하셨고, 결국 6개월 동안 매달 30만 원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저는 ‘이게 정말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일정에 맞춰 다녀야 했고, 에어컨 없이 땀을 흘리며 불편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고, 집으로 돌아오려면 40분 이상 걸어야 했습니다.
이게 과연 ‘카풀’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오랜 교직 생활을 돌아보면, 그 시절만큼 답답하고 서운했던 시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때 만난 학생들과의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날의 교장선생님과 교무부장님께 다시 물어볼 수 있다면, 이렇게 조심스레 여쭙고 싶습니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요?”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제 모습이 가끔 떠오릅니다.
묵묵히 견뎠던 그 시간이, 어쩌면 제 교직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