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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Aug 03. 2020

유우코와 머리끈

다음 공연 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인무대를 둘러싼 관객은 아직 많지 않았다. 완연해진 여름을 머금은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고 바싹바싹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전날 비가 온 탓에 와인색 컨버스는 온통 진흙 범벅이 되어 버렸다. 메인 무대의 모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을 작정이었다. 메고 온 배낭에서 바나나를 꺼내 먹었다. 사람들에 밀려 바나나들이 뭉개지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 생각했다. 락 페스티벌도, 혼자 간 것도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일본 락 밴드 공연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 것도, 처음. 그래서인지 이 모든 설레는 첫눈 같은 나의 모든 처음이 첫 경험이어도, 첫 경험이어서 좋았다. 입 안에서 물컹대는 바나나가 너무도 달았다.


띄엄띄엄 서 있었던 관객들은 공연이 무르익을수록 간격을 좁혀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진 거리에 맞닿아버린 어깨들은 음악에 맞추어 같은 리듬으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옆에는 나보다 작은 키의 여자가 서 있었는데 머리끈이 없는지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잘게 헤드뱅잉을 하고 있었다. 풀썩풀썩 대는 앞머리가 꽤 귀여웠다. 리듬을 색다르게 쪼개는 헤드뱅잉이 옆에 있는 나에게도 전염돼버린 탓에 군중들 사이 우리 둘만 엇박자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저기, 머리끈 필요해?”


여분의 머리끈을 그녀 눈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무대에서는 자우림의 끈덕진 음악이 흘렀고 그 때문인지 나조차도 예고치 못했던 말을 일면도 없는 사람에게 툭-하고 내뱉고 말았다. 음악을 같이 즐기고 있는 동질감, 뭐 그런 거였는지도. 머리끈을 사이에 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몇 초간 보던 그녀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고맙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유우코라고 했다. 한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한지는 이제 5개월이 넘었고 이번 여름방학이 끝나면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한국 락 페스티벌에 자기가 좋아하는 락밴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왜 혼자 왔어?”

“친구들한테 물어봤는데 아무도 안 온다고 해서. 혼자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혼자 왔어. 근데 너무 재밌다.”


유우코는 손바닥으로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일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페스티벌에서 만난 것도 신기하다며 또 박수를 쳤다. 괜스레 나도 웃음이 났다.


다음 공연은 내가 오래도록 기다렸던 일본 락 밴드의 순서였다. 멤버들이 하나둘씩 나와 기타를 튜닝하고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도하듯 손을 맞잡고 질퍽이는 진흙바닥 위에서 얕게 뛰었다. 아무리 직접 그들을 보게 되더라도 무심한 듯 음악을 즐기겠다는 나의 계획은 모두 무산됐다.


“유우코, 너 이 밴드 알아?”

“너 되게 신나 보여. 얘네지? 보러 왔다는 밴드가?”


웃으며 대답하는 유우코에게 이 밴드가 어떤 음악을 하는 밴드인지 신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일본 락 밴드를 일본인에게 설명해주는 한국인이라… 끄덕이며 들어주던 유우코는 이제 시작한다고 턱으로 메인무대를 가리켰다. 보컬을 따라 떼창을 하는 나를 보고 유우코는 자기보다 일본인 같다고 피식 웃었다. 우리는 어깨를 맞닿고 또 기이하게 리듬을 탔다.




저녁이 되니 메인무대 관객들은 뒤에서 좀비 떼처럼 몰려왔고 몸통을 무기 삼아 앞으로 밀어댔다. 앞쪽에서는 경호원들이 종이컵으로 물을 관객들에게 건네줬고 펜스 앞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흠뻑 젖은 빨래처럼 널려있었다. 유우코와 나는 다섯 번째 줄 즈음에 있었다. 점심부터 먹은 거라곤 바나나 하나였기에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건지 내 주변을 둘러싼 몸통들이 날 들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꼭 붙어버린 꼬꼬마 두 명은 사람들에 뒤엉켜 마지막 공연 가수 음악에 맞춰 파도를 탔다. 어두운 불빛 속에 유우코를 돌아보면 흰 이만 보였다. 나도 덩달아 흰 이를 활짝 보이며 웃었다. ‘아-. 너무 재밌다.’ 공연 내내 속으로 읊조렸다. 가까워지는 마지막이 아쉽기보단, 그마저도 즐거웠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사람이 빠져버린 메인 무대 앞에서 우리는 악수를 했다. 즐거웠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대신, 이메일 같은 건 주고받지 않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차를 타야 한다고 뛰어가던 유우코는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면서 갔다. 나도 같이 끝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렇게 작별하는 우리가 꽤 멋졌다. 인사를 마치고 걷다 보니 내 머리끈을 유우코한테 돌려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뒤를 돌아봤다. 이미 꽤 멀리 갔는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둑해진 페스티벌장을 빨리 벗어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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