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배낭여행일기6) 딱 내 눈치만 보는 여행

아 취한다

by dearmycanada


리마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내일 밤 비행기로 토론토를 걸쳐 밴쿠버로 돌아간다. 부엌에서 만난 Cesa씨는 오늘이 일요일이라 친구들과 축구를 하기로 했단다. 그가 묻는다.


- You, go, where, today?


- I ... don't know.


여행할 때 딱히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큰 틀 정도는 짜지만, 맛집이라던가 유적지라던가 꼭 가봐야 할 곳은 어차피 검색해봤자 도착하면 다 까먹는다. 그 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고, 방에 누워만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한다. 맛있는 음식이 많아 보이는 날엔 하루에 4끼도 먹는다. 혹자는 묻는다. 왜 평소에도 할 수 있는걸 거기까지 가서 하냐고. 그럼 나는 반문하겠다. 내가 '여기까지'와서 남들이 하는 걸 다 해야만, 여행이냐고. 여기까지 왔으니, 나는 딱 내 눈치까지만 보겠다. 이것이 내가 여행하는 법이다.





오늘은 좀 멋을 내본다. 그래 봤자 반곱슬이라 부스스한 머리를 고데기로 눌러주는 것뿐이지만. Cesa 씨가 나가시고 유일하게 아는 스페인 노래 Bad Bunny의 Mia를 흥얼거리며 화장도 공들여한다. 바랑코 엘 가야지.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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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코의 벽


다시 온 바랑코는 잠깐 봤던 것보다 훨씬 멋지다. 동네를 산책하듯이 그냥 걸어본다. 인적이 드문 곳에 흘러들어 가니 고양이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다. 장미꽃이 만연한 덤불 속에 있어 하마터면 못 볼 뻔했다. 나를 한번 쳐다봐 주지 않을까 싶어, Kitty라고 불러본다. 꿈적도 안 한다. 영어라서 못 알아듣나.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엘 가면 스페인어로 고양이를 찾아봐야지.





어느 골목, 문득 바라본 전경


11시가 겨우 넘었는데,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 졌다. 버스킹 음악이 잘 들리는, 벽을 짙은 와인색으로 칠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본다. 큰 창 문 앞에 맥주를 시키고 앉았다. 노래를 들으며 마시는데 생각보다 도수가 센 건지, 내가 알코올에 취약해진 건지, 아니면 노래에 취한 건지 알딸딸하다. 안주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턱, 나에게 가져다준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어 서버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는데, 먹으라는 시늉을 한다. 뭐, 공짜겠지? 하고 별생각 없이 먹는데. 웬걸, 너무 맛있다.결국 취했다. 맛있는 공짜 안주와 맥주에 취해 한 병을 더 시켜버렸다. 내가 안주를 잘 먹으니 리 필도해준다. 말은 안 통해도 진짜 사랑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 마음이 전해졌으면. 배도 부르고 걷고싶으니 다시 산책을 나서볼까, 기분이 이끄는 곳으로.


맥주를 마신 음식점


이끌리듯 바다를 보러왔다. 취기가 가시지 않아 밴치에 털썩 앉았다. 바다를 참 좋아한다. 보석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것도 좋고,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진동이 파도로 계속 '나는 살아있단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아서 그것도 좋다. 메시지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쩐지, 덜 외롭다. 파도가 간질간질 마음으로 밀려온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보았다. 오래 보아야 더 아름다움으로.










집에 오는 길에는 안주로 먹었던 칩을 찾으려고 큰 마트에 들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술이 정말 안 깬다. 정신이 없지만 그 와중에 과자를 찾으려고 마트를 싹 다 뒤졌다. 잉카칩 두 봉지와 맥주 한 캔을 들고 집에 왔다. 세상 행복하다.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이 오늘은 쭉쭉 잘만 들어간다. 반쯤 마신 맥주 한 캔은 창틀에, 잉카 칩은 꼭 안은 채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딱 내 눈치만 보니, 이렇게나 더할 나위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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