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 보딩 무서워 안 해
영경씨와 은원씨는 선함이 풀풀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혼자라는 홀가분함에 취해 어느새 반 강제적 비혼 주의가 되어버린 나는 그 둘을 보면서 연신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과 비슷한 미소와 온도를 가진 사람이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남미에서의 긴 신혼여행을 마치고 호주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 내가 페루에서 만난 유일한 이 한국인들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다행이다. 나도 그렇거든.
두 사람은 먼저 같이 다니자며 동행으로 나서 주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을 줄 알았는데, 의지할 친구들이 생겨서 다행이다 싶다. 오늘까지 말을 안 하고 있었으면 아침에 나눈 가이드와의 몇 마디가 전부일 뻔했다. 사막같이 건조하게만 느껴졌던 여행길에 부부는 나의 오아시스가 되어주었다.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좋았고, 무엇보다 한국말로 소통할 수 있어 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두 사람을 통해 아직 내가 가보지 않은 남미(볼리비아, 콜롬비아 등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덕분에 버기는 더 스릴 넘쳤다.
버기카가 출발하자 모래알이 뺨을 스쳐가는 것이 느껴졌고 입을 조그만 열어도 모래로 가글을 하는 느낌이다. 이래서 라마가 침을 그렇게 찍찍 뱉는 거였구나. 급한 대로 선글라스를 껴서 바람과 모래는 막았는데 얼굴을 만져보니 모래 때문에 까슬까슬하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머리는 빗을 수도 없는 정도로 엉켜버렸다. 평소라면 신경이 쓰여 '이게 뭐람' 싶었을 텐데, 그래도 좋았다. 발자국 하나 없는 고운 모래 언덕을 요란한 버기카로 지나간다.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달리지만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옆에 앉은 영경 씨와 은원 씨가 재미있는지 맘 놓고 소리를 지른다. 나도 덕분에 눈치 안 보고 활짝 소리 내어 웃어본다. 좋은 것을 함께 보고 웃을 수 있는 여행 동지가 생긴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이구나.
드라이버는 우리 모두를 높은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이번엔 샌드 보딩이다. 말로만 들었지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 구경만 하고 있는데, 세상에 보기만 해도 아찔한 이 경사를 보드에 몸을 맡겨 내려가는 게 바로 샌드 보딩이다. 다행히 넘어지고 굴러봤자 모래라서 다치지는 않겠지만 나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은원씨가 용기 내서 도전한다. 90도는 돼 보이는 경사에서 보드에만 몸을 맡기고 엎드려 내려가는데, 그런 은원 씨를 보며 다짐한다. 아, 나는 그냥 안 해야지. 아찔하고 콩닥거리는 일은 굳이 샌드 보딩이 아니더라도 많다.
이제는 사막의 노을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실크로드'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버키 카들이 수없이 뚫고 지나갔을 텐데도 와카치나는 흠집 하나 없이 참 곱다. 매 순간 끊임없이 부는 바람이, 가벼워서 흐르는 모래가 빈 곳을 채우고 있나 보다. 모두가 제 역할을 열심히 해낸다. 해가 잘 보이는 곳에 털썩 앉았다. 죽을 때도 아닌데, 괜히 캐나다에서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멈추면 그제야 보인다더니 이 먼 곳까지 와서야 나는 멈추는 법을 배웠다. 열심히는 살았던 것 같은데, 꿈에 부풀어서 막 캐나다에 도착한 그 '소녀'는 어른이 되었나 모르겠다.
혼자 앉아있는데, 영경씨가 같이 사진을 찍자며 옆에 앉는다. 생각해보니, 셀카 몇 장 말고는 남이 찍어준 사진이 없어서 아쉬울 뻔했는데 다행이다. 노을 앞에서 나의 '사연'과 그들의 '사연'이 조심스럽게 오고 간다. 실례될 수 있어 묻지 못했던 결혼에 대한 가치관도 물었다. 담백한 그녀의 언어들이 나와 다른 가치관 마저도 부럽게 만든달까. 가까운 곳에 살았더라면,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나는 괜히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끝나면 캐나다도 생각해 보라도 넌지시 말해본다. 영경 씨가 활짝 웃으면서 대답한다. "캐나다도 좋죠!". 구김살 하나 없는 미소가 와카치나를 닮았다.
사막투어가 끝나고 터미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영경 씨와 은원씨가 묵고 있는 숙소의 치킨이 참 맛있다며 치킨과 맥주를 같이 먹자고 하는데, 예매해둔 리마행 버스 시간이 임박해 온다. 가이드가 나를 불러 택시를 태워보내려는데도 우리는 서로 연신 아쉬워한다. 두 사람을 알까, 사막같이 아름답지만 조금은 황량했던 페루 여행에서 오아시스 같은 사람들이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