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까만 어둠 속에서 나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의 여행을 했다.

by 다정한 지혜씨


[1988.2.27]

할머니 53 나 1

사내아이라고 미리 지레 짐작한 할머니에게 큰 실망을 안기며 내가 태어났다. 아무것도 달고 나오지 않은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할머니는 내게 가끔 화를 내시곤 했다.


[2000]

할머니 65 나 12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간 나는 열두 살이 되던 2000년 밀레니엄 시대에 초등학교 졸업을 했다. 졸업식에는 엄마, 아빠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셨다.


[2001]

할머니 66 나 13

할머니가 다려준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고 당당하게 중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는 아주 나중에 교복을 입은 내가 고소영보다 훨씬 이뻐 보였다고 말씀하셨다.


[2007]

할머니 73 나 20

또래보다 한살이 빨랐던 나는 드디어 스무 살이 되던 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점점 내 방 침대보다 화장실 변기와 잠드는 날이 많아졌고 그 결과 정말 망아지가 되어 아비, 어미도 못 알아본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2008]

할머니 74 나 21

할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사람이 아주 많이 울면 눈 밑이 까맣게 된 다는 사실을 난 이때 알았다.


[2009]

할머니 75 나 22

세상에 할머니와 나, 우리 둘 만이 남았다.


[2014]

할머니 80 나 27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한 나를 보며 할머니는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고 그해 우리는 일곱 번의 이사 끝에 드디어 임대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우리의 야식 메뉴는 항상 치킨이었다.


[2016]

할머니 82 나 29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우리 둘만의 여행을 했다.


[2020]

할머니 86 나 33

내가 시집을 간 뒤로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기 시작했다.


[2022]

할머니 88 나 35

내가 아이를 낳자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매주 교회에 나가셔서 기도를 하셨다고 했다. 깜박거리시긴 했지만 할머니 연세가 벌써 아흔 무렵이었다.


[2024]

할머니 90 나 37

물건도 오래 쓰면 망가지는데 우리 할머니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나를 언니로 착각하시고 집 비밀번호를 잊으셨다고 했지만 난 우리 할머니가 괜찮을 줄 알았다.


[2025]

할머니 91 나 38

나의 할머니, 시간여행자가 되다.

2025년의 5월 말, 할머니가 새벽녘 화장실 앞에서 쓰러지셨다. 할머니는 고관절이 부러지셨고 그 뒤로 다시는 일어서질 못하셨다. 큰 수술을 두 번이나 겪은 할머니는 빠르게 나와 자신이 끝까지 붙들고 있던 여러 끈 들을 동시에 놔버렸다.




구십하나 임희숙 -

지은이 [다정한 지혜 씨]


까만 어둠 속에서 나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의 여행을 했다.

나는 울음으로 태어나 웃음으로 갈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 모든 것을 이뤘으니 됐다.

너는 어땠니? 삶이 즐거웠니?

라고 나는 묻고 싶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고 나는 그 안에서 마음껏 헤엄쳤다.

넘치게 사랑하고 하염없이 행복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아무개는 내 삶이 외로웠다, 고단했다, 말하겠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평안했다.


그러니 너무 많이 울지 말길,

그냥 오래도록 기억해 주길, 그렇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