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

여름방학과 책, 할머니는 나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by 다정한 지혜씨

"방학이 오면 서울로 와"

돌아갈 곳에 언제나 할머니가 있다는 건 어릴 적 나에게 가장 큰 위안이었다. 나는 원래 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 수 기왓장을 하나하나 올려서 만든 그 집에서 말이다. 몇 번이나 페인트칠을 덧칠한 나무문을 열면 시멘트로 된 돌마당과 낡은 수돗가가 있는 그 집을 나는 아주 많이 사랑했다.

나는 그곳에서 무려 7년을 살았지만 이별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나의 행복을 깬 건 아빠였다. 아빠는 새벽녘 할아버지의 인감도장을 가지고 나가 동업하는 친구의 보증을 섰다. 결과는 친구의 연락두절로 끝이 났고 아빠의 실수는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부천으로 내려갔지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살았다.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은 고문이었고 어린아이의 마음에는 병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향수병으로 시작된 병은 밤에는 몽유병으로 낮에는 공황발작으로 진화하였고 나는 꼬챙이처럼 점점 말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었다가 송장처럼 가만히 서있는 날 발견한 것이다. 엄마는 나를 깨우려 흔들어도 보고 뺨도 때려봤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엄마의 말로 그랬다고 했다. 사실상 그날의 기억은 나에게 없었고 엄마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엄마는 나를 서울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것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나는 서울에 간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신이 났지만 속마음을 들키면 엄마가 서운해할 것 같아서 일부러 가기 싫은 척을 하며 엄마의 손을 꽉 잡고 걸었다. 부천에서 할머니가 사는 서울 마포까지 가는 길을 전철과 버스를 타고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마음이 즐거워서 그런지 힘들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힘든 걸 참아야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겠구나 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드디어 도착한 할머니 집에서는 귤 냄새가 났다. 주황색으로 크기가 제각각인 귤들이 많이도 쌓여있었다. 나는 그중 제일 맛있게 생긴 못생긴 귤을 집어 들고는 껍질을 까서 단숨에 귤 알맹이들을 입안으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적당한 신맛과 설탕처럼 단 그때 그 귤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나는 여름방학 내내 손가락 끝이 주황색이 될 정도로 밥도 먹지 않고 귤만 까먹었다. 아마도 고향을 떠난 후 마음의 허기를 채우러 그리도 먹었던 것 같다.


식탐이라곤 전혀 없는 내가 이상하게 할머니 집에 가면 입맛이 돌았다. 아빠와 엄마, 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서 나는 방학 내내 작은엄마, 작은 아빠, 사촌동생과 함께 지냈다. 나는 그 집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행동했다. 나를 일원으로 받아주길, 방학이 끝나도 부천으로 보내질 않길 바라고 바랬다. 그러나 언제나 방학에는 끝이 있었고 나는 다시 부천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일 년 중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 가까이 서울에서 살다시피 한 나는 아빠와 언니와는 정이 붙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보냈어야 하는 모든 날들을 할머니댁에서 보낸 유년시절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지나갔다. 정상적인 소속감을 채웠어야 할 시기에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친 나는 급기야 학교를 제멋대로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 시절 자아와 함께 학교에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무단결석을 하던 나는 결국 엄마에게 덜미를 잡혀 눈물의 매질을 맞았고, 그 결과 학교는 정당한 이유가 없어도 사람이 되기 위해 반드시 다녀야만 하는 곳이라는 걸 배웠다.


고학년이 된 나는 눈치가 생겼고 방학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가는 나를 더 이상 작은 아빠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작은 아빠는 인감도장을 가지고 나간 우리 아빠를 불효자식으로 낙인찍은 후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큰형이었지만 집안을 말아먹은 장본인이라고 생각한 터였다. 그 결과 큰형의 자식인 내가 달가울 리가 없었고 작은아빠는 유독 나에게만 벼락같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 이후 방학이 와도 난 더이상 할머니 집에 가지 않았다. 하나, 다정한 말, 다정한 눈길은 없었지만 항상 작은 아빠의 손에 들려오던 무뚝뚝한 아이스크림 한 봉지, 차디 찬 조기 두 마리, 따뜻한 호빵들 안에는 내 껏도 있었다. 한 순간에 고향을 잃은 어린 조카딸을 자기 부모가 그리워 방학마다 찾아오는 나를 작은아빠는 내치지도 못하고 아껴주지도 못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믿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움과 분노가 옅어진다는건 믿는다. 야속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감사함으로 바뀌어 다가오니 말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사실 작은엄마가 사준 책 덕분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사촌동생을 사준 책이었지만 덕은 내가 더 많이 본 듯하다. 사촌동생의 방에는 책이 정말 많았다. 그 수많은 책들은 책장에 꽂히지도 못한 채 책상과 의자 바닥에 쌓였고 나는 마치 도장 깨기를 하듯 차례차례 그 안에서 몇 백 권의 책들을 읽어 나갔다. 책은 나를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아니면 갈 수 없는 동화 속 나라로 인도했다. 그곳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 드는 곳이었지만 나는 어디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책은 여전히 나에게 도피처로 남아있다. 현실이 힘들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면 나는 책을 통해 힐링한다. 마흔이 가까운 나에게는 더 이상 여름방학은 없지만 앞으로 읽은 책들은 아직도 무수히 많다. 여름방학과 책, 할머니는 나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쉴 수 있는 곳, 내가 여전히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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