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작별인사
들어가며
12월 27일 한국에서 최초로 개봉한 류이치 사카모토 (1952.1.17-2023.3.28, Ryuichi Sakamoto)의 임종 전 마지막 연주를 담은 영화 <오퍼스>. 암 투병으로 인해 몇 년 동안 공연을 진행하지 못했던 사카모토는 죽음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자신이 50여 년 동안 작곡했던 20곡을 선택해 피아노 연주를 하였고 자신의 연주 장면을 한 영화감독에게 촬영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촬영을 담당했던 영화감독은 사카모토의 아들인 네오 소라였으며 그는 아버지의 연주를 촬영하면서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는 아버지의 음악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영화에서 들리는 소리는 사카모토의 피아노 연주와 말소리뿐이다. 또한 시각적인 자극을 배제하기 위해 소품과 조명은 최대한 간결하고 어둡게 설정되었으며, 흑백장면으로 사카모토의 연주장면이 차분하게 그러나 매우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인생
한국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친숙한 일본의 작곡가이자 영화 음악가인 류이치 사카모토.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도쿄예술대학 클래식 작곡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한, 이른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뮤지션이다. 70년대부터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일본의 유명한 대중음악가 호소노 하루오미와 다카하시 유키히로와 함께 3인조 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대중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음악 레퍼토리들을 다양하게 선보였으며,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활동 덕분에 사카모토는 뮤지션으로서의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80년대에 사카모토는 영화음악 작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영화 <마지막 황제> 및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OST 작품들은 사카모토의 대가로서의 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메인테마곡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사카모토의 대표작품 중 하나이다. (또한 이 영화는 사카모토가 음악 담당 겸 주연 배우로 출연했었고 영국의 유명한 팝 가수인 데이비드 보위 (David Bowie)가 영국 육군 소령역으로 출연해 더욱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10년대 이후에는 사회운동가 및 환경운동가로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일본의 원전반대 운동과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음악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14년 인후두암 판정 이후로 한동안 활동이 뜸했었지만 사카모토는 작품활동에 대한 의지를 결코 꺽지 않았다. 2020년 직장암 판정을 받은 후 건강이 급격이 악화되어 연주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였지만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사카모토는 혼신의 힘을 담은 피아노 연주를 하였고 103분간의 피아노 연주 장면은 영화 <오퍼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다큐영화 <코다> (Coda) 와의 비교
개인적으로 <오퍼스>를 보기 전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일상을 담은 다큐 영화 <코다>를 먼저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이 영화는 사카모토의 데뷔시절 음악활동부터 현재 사카모토의 진솔한 인터뷰를 주제로 하였다. 화려하고 대중적이며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젊은 시절부터 절제된 소리 가운데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중년 이후의 사카모토의 다양한 음악들을 살펴볼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사카모토의 인터뷰를 통해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음악활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조용하면서도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으며 바흐와 드뷔시를 존경한다는 그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영화 <오퍼스>에서는 <코다>와는 달리 사카모토는 오직 그의 음악 연주를 통해 관객과 소통한다. 특히 사카모토의 대표곡인 <Merry Christmas Mr.Lawrence>는 이 두 영화에서 상반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 <코다>에서는 이 곡이 2011년 일본 대지진의 현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재민들을 위로함과 동시에 원전가동을 반대하기 위한 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즉 이 곡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주된 것이었다. 반면에 영화 <오퍼스>에서 들리는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사카모토의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내밀한 표정 및 몸짓을 여실하게 담아낸 곡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사카모토는 이 곡을 연주할 때 다른 곡들을 연주할 때에 비해서 매우 긴장하고 몰입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여주었다. 이 곡을 통해 사카모토는 죽음을 앞둔 자신의 두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아님 이 곡에 대한 자신의 크나큰 애착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 답은 사카모토 자신만이 알겠지.) <코다>를 먼저 보면서 사카모토의 지난 50여 년의 음악활동 경력과 인터뷰 장면들을 이해하면 <오퍼스>에 나오는 사카모토의 연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사카모토의 음악에 대한 겸손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태도 또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고.
절제됐지만 숨막히는 사카모토의 피아노 연주 & 바흐와 드뷔시를 존경하는 사카모토
영화 <오퍼스>에서 나오는 사카모토의 곡들은 모두 느리고 정적이며 서정적인 곡들이다. 또한 다이내믹 역시 극적이라기 보다는 비교적 절제되고 차분한 편이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한 음 한 음 연주할때마다 자신의 모든걸 걸고 목숨을 걸듯이 연주한다. 하지만 대가인 사카모토 역시 사람인지라 몰입된 연주 후에는 휴식이 필요하고 종종 연주 실수도 한다. 그러한 장면들을 굳이 편집하지 않고 영화에 있는 그대로 담아내었다. 잠깐의 휴식 후에 사카모토는 서정적으로 그러나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연주에 끝까지 몰입한다. 또한 아까도 언급했듯이 사카모토는 바흐와 드뷔시를 존경한다고 하였다. 이 영화에 나온 곡들 역시 바흐와 드뷔시의 음악어법을 레퍼런스 삼은 곡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어 바흐의 선율 모방 기법이라든지 드뷔시의 온음 음계 기법 및 선법을 인용한 작곡 스타일 등등. 이러한 음악적 레퍼런스들을 기반 삼아 사카모토는 오로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오랜시간동안 정성껏 구현해냈다.
나가며
영화 <오퍼스>는 대사 없이 오로지 차분한 피아노 연주로만 진행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다소 지루하거나 졸릴 수도 있다. (심지어 감독인 소라 네오도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다가 자거나 졸아도 된다고 하였단다.) 그러나 사카모토의 70년 음악인생을 들여다보고 싶고 또한 차분하게 연말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다. 사카모토의 절제되고 차분한 피아노 연주가 혼란스럽고 어수선한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줄 수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