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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inko Jul 04. 2022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돈버는 일

갑자기 모르는 회사에서 번역이 가능하냐는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내가 몇 년전에 지원했지만 연락이 없어 잊어버렸던 영상번역 회사였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궁하던 그 시절에는 연락이 없거나 연락이 와도 샘플테스트 후 죄송하지만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며 불합격 통보를 내리고 몇 년이 지나 아예 잊어버릴때쯤 인력이 부족해서인지, 시간에 쫓겨서인지 불쑥 연락이 온다. 


다른 일로 바빴던 이유도 있지만 그때 지키지 못했던 자존심도 지키고자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못한다고 답장을 썼다. '죄송하지만'까지 쓰고 있는데 '음악 관련 영상이라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는데 괜찮으신가요?'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을 다시 제대로 읽어보니 그냥 음악 영상도 아닌 레코딩과 믹싱 관련 강좌 영상 번역이었다. 영어로 된 레코딩과 믹싱 관련 강좌라면 유튜브가 한국에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내가 거짓말 안하고 천 개 정도는 봤던 콘텐츠다. 


나는 이미 타이핑했던 다섯 글자를 지우고 다시 메시지를 썼다. 

'이 분야라면 제 전공분야라서 제가 할 수 있는데 혹시 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영상번역 페이가 정말 말도 안되는 곳이 많기 때문에 페이가 맞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역시 생각했던 것만큼 적었고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다는 나의 강력한 주장에 조금 인상할 수 있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분야에 페이까지 올렸으니 이게 왠일인가 싶은 마음이었다. 신나는 마음으로 파일을 열었다.


나의 역할은 이미 전사된(받아 적은) 자막을 기계번역으로 한번 돌린 번역문을 보고 틀린 내용을 수정하는 최종 검수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한 구글번역이 아직 음악 분야는 섭렵할 시간이 없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제멋대로 번역을 해놓았다. 


헤르츠가 hurts라고 전사되어 300hertz가 '300개의 상처'로 번역되어 있었고-트뤼포 영화를 떠오르게 한 번역이었다- 금관악기 호른horn이 모두 '뿔'로, 킥kick은 '발길질'로 번역되어 있었다.노래의 반복되는 부분인 후크hook는 '갈고리'로, 저음부분low-end는 '하류층'이 되어 있었다. 결국 검수비만 받고 번역 및 검수까지 모두 다 새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내가 설득해 페이까지 올렸으니 제대로, 잘할 수 밖에. 


작업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다른 번역가들 같았으면 슥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넘어가지 못했다. 소리에 적용하는 효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부터 제대로 이해하고 배우고 그 다음 한국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해야 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한 문장을 몇 번이고 돌려서 다시 보고 확인하고 소리도 들어보고 보이지도 않는 영상 속에서 흐리게 보이는 글씨 및 버튼들을 눈이 빠져라 확인했다. 


의기양양했던 시작이 무색하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무려 사흘에 거쳐 작업을 마무리 하고 녹초가 된 몸으로 최종 파일을 보냈다. 드디어 끝이구나! 

그런데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나머지 30분 분량 보내드릴게요'라는 답장이 왔다.


여태까지 난 내가 한시간 분량을 작업한 줄 알고 있었다. 30분 분량을 완료했다는 건 즉, 내가 사흘간 6만원 어치 일을 했다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확실히 확인을 안한 내 잘못이지만 그 때 받은 충격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할애한 시간을 최소로 잡아도 열 시간 정도 될테니 시간당 6천원 정도에 일을 한 것이다. 


충격을 감추고 사실 이 번역을 하는데 사흘이 걸렸는데 나머지 반을 하려면 또 그 정도가 걸릴 테니 나는 여기까지만 함께 일하겠다고 정중히 답장을 보냈다. 번역 에이전시도 꽤 놀란 눈치였다. 다른 번역가들은 한시간 분량하는데 평균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할 수 없느냐 재차 물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완벽하게 해야 하는 기질상 그렇게 하는 건 힘들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야심찬 영상번역 프로젝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업체 입장에서도 영화나 드라마도 아닌 강좌 영상 번역에 큰 예산을 쓸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나는 내가 돈을 받은만큼, 적당히 일하지 못했다. 만약 음악이 아닌 다른 분야였다면 에이전시에서 원하는 속도와 조건으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이기 때문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강좌를 보고 정보를 얻고 제대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시간을 투자해서 일을 맡아서 계속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게 할 의향도 물론 없다. 10년 전 쯤이라면 돈을 안 받고서라도 경험과 이력을 쌓는다는 명목으로 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재능기부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열정도 없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번역을 시작한지 어언 15년, 과연 무엇이 더 훌륭한 번역가의 자질일까. 만족스럽지 않은 예산 안에서 딱 그 정도에 상응하는 노력으로 주어진 역할만 빠르게 해결하는 번역가와 본인이 전문성을 갖고 있는 분야에는 높은 수준의 품질을 보장하지만 물론 더 높은 예산과 시간을 제공해야 하는 번역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자가 모두가 선호하는 능숙한 번역가이다. 그렇게 적당히, 신속히,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가 탐내는 수완이자 필수적인 기량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일을 날렸다. 너무 좋아해서, 너무 잘하려고 해서, 그래서 돈을 못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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