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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Mar 26. 2022

미카엘로 살아내야 하는
세상 모든 로레들에게

영화 [톰보이]

영화 한줄평에 누군가 이렇게 적었다.    

‘피 튀기지 않아도 그 어떤 영화보다 잔인한’


극 중 주인공 ‘로레’는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을 나타내는 ‘톰보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표현하였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포스터에서부터) 당연하게도 이 아이를 남자아이로 바라본 난,

동생 ‘잔’이 ‘로레’를 언니라 부르는 장면에서 아차 싶었다.

가슴이 나오지 않은 짧은 머리에 축구를 좋아하는 ‘로레’를 당연히 남자로 받아들인 그녀의 친구들처럼

나 역시 사회가 만들어낸 각 성별이 지녀야 할 ‘잘 어울린다’를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결국 ‘로레’로부터 ‘미카엘’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 부끄러운 인정과 동시에 나의 시선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타인의 시선을 맞춰주기 위해 ‘미카엘’이란 이름 뒤에 숨어 사는 세상의 모든 ‘로레’들.


삽십여년을 살아오고 있지만 가끔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 했던 로레처럼 

지금 서있는 이곳이 낯설다란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럴때면 난 나의 미카엘을 만들어내곤 한다.

꽤 듬직한 딸, 꽤 편안한 친구, 꽤 인정할 수 있는 직원의 모습으로.. 

그렇게 수많은 다양한 모습의 미카엘을 만들어가며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일기를 쓸 때조차 솔직한 감정을 적어내는 것이 부끄러워 

애써 단어를 고르고 골라 있어 보이는(?) 문장으로 마무리 지을 때

뿌듯함과 동시에 쓸쓸함이 느껴지는 나를 돌이켜 볼 때 마다 ‘로레는 잘 있는걸까?’란 생각이 든다.

낯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발 맞춰 살아냈더니 어느덧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미카엘’이 어쩌면 ‘너를 위한 미카엘’이었던건 아닐까란 진실에 씁쓸해지긴 하지만,

로레라 고백하는 순간 파란 원피스 입기를 강요받을 것이며, 친구들은 나의 민낯을 시험대에 올릴 것이다.

상처 받은 표정과 목소리로 ‘그렇다면 좋은 방법을 알려줄래? 난 도저히 모르겠거든.’라 말하는

로레의 엄마 덕분에 로레는 상처를 받을 수도 없다.

세상의 수많은 기준들로 사이에서 수도 없이 상처를 받았지만 결국 가해자는 내가 되고 만다.


영화 속 열 살 남짓 소녀의 미카엘은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눈부시게 다정한 비밀이라 여겨질지 몰라도

난 ‘로레’를 들키지 않아야 하는 노련함을 지녀야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나의 로레에겐 미안하지만 난 오늘도 미카엘의 이름 뒤에 숨어 지내야 한다.

오랫동안 감춰진 나의 로레는 험상궂은 야수의 모습으로 변해버린건 아닐까?

당분간 나의 로레를 보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진짜 이름을 물어봐주는 ‘리사’의 용기를 꿈꾼다. 
언젠간 미카엘은 미카엘대로 로레는 로레대로 사랑해주는 ‘잔’을 닮아가길 바란다.
미카엘이란 가면 따윈 필요 없는 날들이 더 많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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