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간 로지 아줌마
차를 타고 10분만 벗어나고 여기가 어딘지 모를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자연 속에 있지만 아무리 작다고 해도 옐로나이프는 도시였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교통 체증이 있고 대형 마트에는 사람이 몰린다. 고층 건물도 있고 쓰레기며, 상하수도 처리를 위해 시정부는 바삐 움직였다. 북위 62도에서도 도시인의 삶은 지구 반대편 북위 38 언저리의 도시에 사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옐로나이프라는 도시가 아니라 자연을 찾아 여기까지 날아왔다. 방송에서도 오로라 빌리지 풍경과 별개로 뭔가 자연 친화적인 그림이 필요했다. 그래야 오로라라는 주제와도 잘 어울릴 터였다.
로지 아줌마 또는 로지 여사로 불리는 Rosanna Strong 아줌마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Strong Interpretation이라는 이름의 숲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옐로나이프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알려줄 적임자로 제작진이 섭외를 해두었다. 약속된 날짜에 아침 9시부터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로지 아줌마를 기다렸다. 하지만 10시가 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닿지 않았다. 선진국에서는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기본 아니냐며 살짝 짜증이 나는 찰나에 어렵게 전화 통화가 되었는데 오늘이 아니라 내일로 예약이 되어 있었다고 했단다. 모든 일정을 한국에서 미리 맞춰놓고 왔는데 아마도 제작진이 한국 날짜로 착각해서 그런 사달이 난 것이었다. 덕분에 그날 오전엔 특별한 일정이 없이 편하게 쉬고 다음날 아침 정확한 시간에 호텔 로비에서 로지 아줌마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고 그녀의 손을 따뜻했다. 숲체험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과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잠깐동안 그녀는 사려 깊고 친절했고 밝고 쾌활했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눈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고 수십 년의 웃음은 그녀의 눈가에 아름답고 멋있는 눈주름을 선물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삶 자체가 행복한 사람의 표정을 발견하곤 자연스레 무장을 해제했다. 아내와 나, 가수 R은 그녀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녀의 집이자 일터인 숲으로 향했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도로는 숲 사이로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인적은 없었고 몇 킬로미터를 달리면 겨우 집이나 건물 한 두 채가 나타났다. 주로 연구소나 광산이라고 했다. 로지 아줌마의 숲체험 장소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렸고 같은 듯 다른 풍경 때문에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로지 아줌마가 사는 마을엔 소리를 쳐도 들리지 않을 거리에 이웃 몇 집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호숫가 숲 속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고 아담한 집은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하고 최대한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잠시 집안에 들렀는데 난방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데도 집안이 따뜻했다. 집 뒤에 있는 숲이 바로 숲체험을 하는 곳이었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눈이 많이 오지 않았다고 했지만 한 번 온 눈은 겨우내 좀처럼 녹지 않으니 그대로 쌓였다. 설피를 신자마자 우리는 숲탐정(Forest Detective)으로 임명되었다. 눈 위에 난 발자국으로 토끼나 쥐, 여우 같은 동물의 흔적을 좇았고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40년을 자라도 내 키보다 작은 나무를 보면서 이곳의 자연은 식물들에게 얼마나 척박했는지, 그 척박함 속에서 버티며 조금씩 조금씩 몸집을 불려 가는 나무들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를 배웠다. 선주민들이 약이나 차로 쓰던 식물에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사과 저장 창고에서만 나는 향이 나는 식물도 있었다. 눈을 파헤치면 그 아래에선 작은 식물들이 눈이 녹는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으로 가득한 숲 속에서 R은 저절로 아름다운 선율의 캐럴을 불렀고 눈물이 금세 얼어버릴지도 모른다면서도 로지 아줌마는 눈물을 흘렸다. 대단한 감수성이다. 설피를 신은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졌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숲탐정 세 명은 로지 아줌마를 뒤를 따르며 귀를 쫑긋했다. 숲체험의 마지막은 따뜻한 텐트 안에서 함께하는 점심식사였다. 텃밭에서 재배한 각종 채소와 빵, 그리고 직접 만든 따뜻한 애플 수프. 계핏가루와 사과를 갈아서 만든 수프는 오묘하게 맛있었다.
가수 R은 아까 숲에서 부른 노래가 못내 아쉬운 듯했다. 가사도 정확하지 않았고 전곡을 부르지도 못했다. 노래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일이 직업인 가수 R은 자신에게 가장 특별한 곡이라는 가스펠송을 불러 로지 아줌마에게 특별한 선물을 했다. 아름다운 선율이 텐트 안에서 애플 수프의 뜨거운 김과 함께 흐르자 로지 아줌마의 눈에서도 또다시 따뜻한 눈물이 흘렀다. 지금까지 숲체험을 하면서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준 사람이 홍콩에서 온 오페라 가수가 유일했는데 가수 R이 노래로 자신을 울린 두 번째 사람이라며 고마워했다. 노래를 부른 가수 R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도 훈훈해졌다. 텐트 안의 온도는 더 올라갔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나 꿈꾸지만 정작 수많은 핑계를 대느라 실천하지 못하는 자연 속에서의 삶을 사는 그녀의 용기가 존경스러웠고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도시에 살면 어느 것 하나 불편한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마음은 늘 결핍 상태다. 그리고 그 결핍은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강렬하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버리고 더 중요한 것을 찾아 자연으로 떠난 사람들은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의 동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로지 아줌마가 그랬다. 식물학과 동물학을 전공한 그녀는 숲체험 하는 동안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외조의 화신 그녀의 남편과 26년 전에 연구원 부부로 처음 옐로나이프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다 보니 2년씩 계속 연장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어느새 옐로나이프 사람이 되어 있었단다. 뭔가 오묘하고 심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조금 허탈해졌다. 하지만 26년째 옐로나이프에 살면서 시내가 아닌 숲 속에서의 삶을 선택한 부부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자연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선주민의 삶과 전통에서 공존의 미덕을 배우고 있었다. 오묘하고 심오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삶에는 이미 오묘함과 심오함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모여있는 새를 보기 위해 잠시 차를 세웠을 때도 길가에 버려진 빈 캔을 알뜰하게 줍는 그녀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내는 오로라만큼이나 로지 아줌마와 함께 한 숲체험을 옐로나이프에서의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내가 본 것은 이국적인 숲의 풍경이 아니라 극한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가장 단순해져야 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건 아내가 늘 갈망해 왔던 삶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