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의 탈을 쓴 두려움의 울부짖음
한국 사회의 대부분 아이들은 위인전을 읽고 자란다. 위인전 속에는 개혁, 정복 군주부터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를 읽고자란 청년들에게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란, 역사에 위대한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표백>의 세연에 따르면 더 이상 한국 사회에는 달성할 “중요한 역사적 과업”이 없고, 따라서 청년들은 “큰 꿈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이러한 한국 사회를 세연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명명한다. 완전히 표백되어, 표백제를(혹은 하얀 페인트를) 손에 쥔 청년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좌절하는 시대.
세연의 사상은 그녀를 따라 자살을 행하는 추종자를 여럿 만들 만큼 강력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도 그녀의 언변에 매혹된다. 하지만 소설 끝에 남는 것은 세연과 추종자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세연의 극단적인 표출 방식[자살]이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되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화려함에 숨겨진 세연의 연약함은 그녀가 개사하여 부르는 노래 가사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험하디험한 세상입니다, 잔인한 세상이에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도 아니고요
하지만 한 가지 우리 모두 똑같이 바라는 게 있잖아요
함께 노래해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세연은 청년들의 총명함이 과업으로 이어지지 않는 세상에 상처받았다. 그런 그녀에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청년들이 그들도 세상에 실망하고 상처받았다며 그녀의 뜻에 동조하는 것, 그리고 청년들의 자살이라는 충격을 통해 세상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세연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가 주장하는 "표백 세대"를 톺아보자.
가끔 내가 세상에 뭘 보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렸을 때 나는 사람이 저마다 검거나 붉거나 푸른 색깔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 색들이 어울려서 세상이라는 화폭에 어떤 이미지를 그려낸다는 상상을 했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압도적인 재능을 펼쳐 그 주변으로 그 개인이 지닌 색의 빛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어.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중략)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세상이라는 화폭에 뚜렷한 얼룩이 있다면, 청년들은 그 얼룩을 지우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세연에 따르면 지금 세계는 "너무나도 완벽한" 흰색이기에,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미 알려진 정답을 책에서 찾아, 정확한 하얀 색상을 덧칠하는 것밖에 없다.
"표백(漂白)"이라는 비유에는 분명한 흠이 있다. 세연은 표백 세대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가 그녀가 꿈꿔온 오색찬란한 세상과 대조된다고 한다. 하지만 흰색은 모든 빛이 함께 발광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빛이다. 세상이 팔레트, 개개인의 가능성이 물감이라면 물론 여러 색의 합산이 흙빛이 되겠지만, 빛이라는 색의 본성으로 접근하면 백(白)은 모든 빛의 합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속 접속사 "그런데"는 오류다. 그동안의 개인이 저마다 지닌 색을 마음껏 뽐냈기에, "그래서" 세상은 흰색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흰색을 흐릴까 두려워 흰색만을 더하려는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관점을 바꾸어 색이 아닌 "빛"에 집중한다면, 청년들이 계속해서 저마다의 색을 더해야만 흰빛이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과연 세연은 흰색을 "빛"의 관점으로 해석했을 때의 반론도 준비했다. 바로 흰색은 모든 빛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것은 흰색이 아닌 검정이다. 흰색은 모든 빛을 반사한다. 세연의 오류는 그녀의 착각을 반영한다. 세연은 세상이 자신의 빛깔을 앗아가고 흡수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세상이 흰 빛이기에 그녀가 장학생으로서의 발판을 다지며 총명함을 갈고닦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백(白)이란 색상을 넘어 표백(漂白) 행위를 짚어보자. 표백(漂白) 단어 자체에는 하얗게 빨래하다는 뜻도, 화학 약품으로 탈색하여 희게 만든다는 뜻도 있다. 두 행위는 하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비슷하지만, 본질을 완전히 다르다. 하얗게 빨래한다는 것은 본래 흰색인 것을 물과 비누를 통해 세척하여 본모습을 되돌려놓는 행위이고, 탈색하여 희게 만드는 것은 본래의 색을 옅게 하여 희게 만드는 것이다. 세연은 아마 중의적 표현을 의도하고 이 단어를 선택한 것 같다. 굵직한 부조리가 사라져 하얗게 빨래된 세상. 따라서 개개인이 돋보일 특별함이 하얗게 탈색된 세대. 사회가 그 자체로 완전하여 개개인이 역할을 잃는다는 세연의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많다. 세연은 현존하는 환경문제를 비롯한 사회 이슈는 그전 세대들이 맞서야 했던 시대의 과제보다 시시하다며 미리 선을 긋는다. 하지만 화자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듯, 시대의 과제가 시시한지 중요한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 달렸다.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앞서 탐구한 "표백" 개념의 모순으로부터 세연의 생각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세연과 그녀의 추종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다. 무언가를 달성해야 한다는 열망, 자신이 하는 일이 표면적이고 시시하다는 불안감, 역사 속 인물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초라함, 그리고 자신의 시대를 멋지게 장식하고픈 열정이 뒤엉켜 만들어낸 괴물이다. 괴물은 각자의 머릿속에 살고 있다. 괴물을 없앨 방법이자,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릴 방법으로 세연이 택한 것이 바로 자살이다.
그럴 때 그녀는 계략가도 귀부인도 투사도 폭군도 아닌, 길을 잃고 우는 어린아이, 가여운 영혼으로서의 자신을 보았다.
세연은 자살을 통해 괴물을 멋지게 물리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두려웠다.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이 소설로부터 사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청년들의 반항이 아닌, 그 속에 숨겨진 청년들의 불안이다.